베트남 문화탐방

       

                     

 

               

손승호※

 

 

 

 

차례

 

. 탐방 목적

. 손짜반도의 영응사(應寺)

. 오행산(마블 마운틴)

. 미숀 참파 유적지

Ⅴ 바나 힐 국립공원

. 하이반 고개

. 후에 왕궁

. 까오다이교 사원과 다낭 대성당

. 맺음말

 

 

이 글은 원맨쇼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지고 안강농협 초청으로 안강에서도 강연을 한 바 있는 박은득 선생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봄부터 벼르던 탐방을 바쁜 일정으로 미루어 오다가 이번에 베트남 현지의 청룡부대 주둔지 및 격전지를 방문하여 현장을 관찰하고 베트남 최후의 왕조가 있었던 후에(HUE)로 이동하여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을 탐방하기 위하여 베트남 중부지역인 다낭으로 가서 약 1주일 간 체류하며 보고 느낀 내용을 진솔하게 기록한 것이다

 

 

 

 

*예비역 소령,, 수필작가, 한국어 강사

 

 

. 탐방목적

 

20181104BX 735 항공기를 타고 베트남의 중부 도시 다낭으로 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 있다. 왜냐하면 베트남(월남)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군이 해외파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던 국가이다.

 

19649111차 파병을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파병이 이루어졌다. 당시에 본인도 포항역에서 환송식을 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 국군은 서울역이나 포항 등 주로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하여 다시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약 1주일 간 바다를 달려 베트남의 항구에 도착하여 소위 말하는 월남전쟁의 각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때 환송 나온 부모형제들이 눈물을 훔치며 울고불고 아우성치는 음성이 귀에 들리고 눈 감으면 애타는 어느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비둘기부대(공병),(해병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육군) 등 육해공군 그리고 해병대와 기타 요원이 파병되어 1973년 3월233월 23일 파리협정에 따른 철수 때까지 평화 수호에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아시아 지역의 안보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했다. 1).1)

 

통계표를 살펴보니 총 325,517명이 참전하여 사망자 5,099, 부상자 11,232명 실종자 4명이 발생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고엽제에 의한 피해자 수도 2007년 기준 무려 159,132명에 이른다.

 

이러한 피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전쟁 참전 수당과 차관을 받아내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월남전의 현장을 방문하고자 했던 바람이 이루어졌다.

 

 

월남전 파병과 관련하여 여러 일화가 있는데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월남전 파병 요청을 받고 밤을 새우시며 고심을 거듭하셨다고 전한다. 파병을 하면 경제부흥(經濟復興)을 기약할 수 있는 차관 등이 가능한 반면에 우리 국군이 피를 흘리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파병이 불가하여 잠을 이룰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進退兩難) 입장에 처하여 밤이 새도록 담배를 피우셨다. 아침에 비서가 집무실에 들어가니 담배꽁초가 한 그릇 쌓여 있어다는 목격담이 아직도 회자된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신 대통령이 얼마나 국가를 위하여 노심초사(心焦思)하시었는지 그 고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비행기는 약 4시간 만에 다낭 공항에 착륙했다.

한국에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기로는 다낭공항이 마치 장례식장을 연상하리만큼 음침하고 초라하다고 들었는데 실제 공항에 들어서니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어 국제공항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베트남은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니 한국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놀랍다. 여기가 한국인지 베트남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

나는 이곳에서 월남전 당시 한국군 전투지역을 분명히 둘러보고 부차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적지를 탐방하고 갈 작정이다.

시차는 2시간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맞추었다.

 

일단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시실리안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베트남 지도를 펴 놓고 이 나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가 말하는 베트남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다..

월남이 패망하고 수도를 하노이로 정하였으며 월남의 사이공은 호찌민(胡志明) 시로(胡志明) 개칭되었다.

 

 

면적은 약 33만k33만 k㎡로 한반도의 1.5배이고 인구는 약 9,649만 명으로 세계 15위다.15위다. 언어는 베트남 언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불교가 80%이고 천주교, 까오다이교, 기독교 등이 소수다. 국기는 과거 월맹의 금성 홍기(金星紅旗)를(金星紅旗) 사용한다.

 

베트남은 남북이 긴 나라이고 중부는 베트남 아가씨들의 허리처럼 날씬하고 좁다. 54 민족이.54 공존하나 KINH(Viet)족이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100만 명 이상 되는 민족은 낀족,, 타이족, 프엉족, 크메르족 등이다.  수도인 하노이가 북쪽에 있으며 남부의 중심도시는 호찌민시이며 중부의 중심도시는 다낭을 들 수가 있다. 베트남 민족은 이웃과 유대가 좋고, 조화를 잘 이루며 융합을 잘하고 융통성이 있다고 한다.

 

.  손짜반도의 영응사(應寺)

 

아침 일찍 일어나 미케 비치 해변으로 나갔다. 도로에는 신호등이 없었다.

명성에 걸맞게 참으로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고 하얀 파도가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나갔다가를 반복하며 은빛 물보라를 소리 없이 일으키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둥 떠가는 양태가 그림같이 보인다. 백사장이 길기도 한 이곳은 관광지 개발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노변 쪽에는 코코넛 나무가 일정 간격으로 심어져 도시의 미를 첨가시키고 있었다.

주변을 관찰하니 50층의 건물이 신축되는 것을 비롯하여 대소 건물들이 경쟁하듯 망치 소리를 힘차게 내고 있었다.

 

첫 일정은 영응사로 시작한다. 꼬불꼬불한 해변 길을 몇 구비나 돌아 손짜반도에 우뚝 서 있는 부처상이 범상치 않는 사찰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광객이 비켜 설 틈도 없이 많이 온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천히 올라가 보니 단박에 압도되는 높이 66m에 달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Lady Budda)이 우뚝 서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이곳에 오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또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도 했다.

나는 간혹 지나가는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면 “신-짜오”(안녕하세요)라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무심코 얼핏 위를 쳐다보니 부처상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사진 1 - 손짜반도에 있는 영응사
 

 

여기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은  보트피플의 상흔(傷痕)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워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곳은 1970년대 보트피플 난민들의 탈출 경로로 각인된 항구다. 보트피플(Boat People)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바다에 배를 띄워 해로를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베트남의 보트피플은 월남과 월맹이 통일되기 전부터 속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월남이 월맹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경우 월남의 정치인, 군인, 관료 등을 지냈거나 프랑스 정부 밑에서 일을 했던 부유층 즉, 부르주아 계층을 탄압하여 반드시 숙청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사진 2 - 월남 난민들의 보트피플

그런 이유로 197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약 100만100 명의 보트피플이 해로를 통해 보트를 타고 탈출을 기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이 안전하게 국외로 탈출하는 방법은 일단 보트를 이용하여 홍콩으로 가서 그다음부터 배가 아닌 다른 이동수단으로 빠른 시간 내에 국외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 일본이나 호주로 가는 것이었다. 다낭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는 약 1,100km이고 다낭에서 남아시아나 오세아니아 쪽으로 가는 길은 약 2,000km나 됐다. 부유층의 경우는 운이 좋게 홍콩으로 정착해 프랑스, 독일 , 미국, 캐나다로 도피할 수가 있었지만 중산층은 별도리 없이 2,000km를 바다로 떠돌면서 보트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간신히 연명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도중에 바다에서 죽은 난민만 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탈출을 시도하는 초기 바로 이 해변에서 공산주의 연맹 본부 요원들이 뒤따라 와서 따발총으로 드르륵드르륵 갈겨서 죽이고 여기서 살아 나간 나머지는 약 50만 명이 해적에게 죽고 그 나머지 사람들만 탈출에 성공하여 전 세계에 퍼져 생존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미국으로 탈출한 2명이 성공하여 많은 금액을 희사하여 이 곳 해변에서 피바다를 이루며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뜻에서 절과 관세음보살상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나라를 잃는 설움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잘 대변해 주는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청룡부대가 주둔했다고 알려 주었다.

 

세계 5대 해변의 하나인 미케 비치 해변에서 좌측으로 바라본 손짜반도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이면에 이런 슬픈 보트피플의 숨은 역사가 숨 쉬고 있다니 마음이 씁쓸하다.

 

 

. 오행산(마블마운틴)

 

 

   사진 3- 멀리서 바라본 오행산  

 

오후에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다음 행선지는 오행산이다. 이동하면서 차창 밖을  보니 도로에는 수많은 오토바이가 마치 경기를 하듯이 질주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베트남에는 오토바이가 그렇게도 많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한다. 가이드는 전국에 약 5,0005,000만 대의 오토바이가 있다고 하면서 행인들이 길을 갈 때는 앞으로 곧장 가면 그들이 알아서 피해 간다고 설명했다,

 

하루에 오토바이 사고로 숨지는 사망사고가 40건에 이르고 어지간한 오토바이 간 접촉사고는 슈퍼에서 만나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주스 한 병을 사 건네주고는 서로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시내를 돌고 돌아 대리석 조각상이 즐비한 어느 산 아래에 주차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오행산이다..

오행산은 불, , 나무, , 땅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손오공이 감금되어 있었다는 전설로도 알려진 이곳에도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었다.

 

월남전 당시에는 베트콩들의 은거지로 이용되었고 또 야전병원이 운영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동굴 입구 좌측면  절벽에 핀 꽃들이 너무 아름답다. 산에는 불그스레한 꽃이 작은 연못에는 수련이 활짝 피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행산은 천당과 지옥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어느 지점에서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 길이 갈라져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가 자연동굴 안으로 들어서니 점점 신비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동굴 안 여러 장소에는 대리석 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대형불상, 본존불상, 용상, 신을 모시는 여러 재단이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보는 사람들을 저절로 감탄하게 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예술적 감각이 탁월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 들어가니 동굴 안에 제법 넓은 장소가 있었다. 우측 벽에는 전적비가 조각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총탄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향을 피워 냄새가 진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연 동굴이긴 한데 전쟁 당시 은폐, 또는 엄폐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손을 댄 흔적도 간간히 보였다. 정면으로 직진하여 끝까지 올라가 향불을 피우고 묵념을 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 찰나 측면 동굴 천정 구멍에서 강렬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부시다. 아마도 전쟁 시 동굴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을 섬멸하기 위하여 폭격기가 포탄을 투하하여 큰 구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가이드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전쟁의 아픈 상처가 아물려면 더 많은 세월이 흘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공관(玄空關)이라는 하늘을 만난다는 관문을 만났다.

사람들은 덥다고 더 이상 올라가기를 포기하였지만 나는 모험심이 발동하여 약 90도에 가까운 경사로 끝까지 좁은 길을 올라 동굴 천정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동굴의 경사길은 사람과 사람이 겨우 교차할 수 있는 좁은 길이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분다. 구석구석마다 어느 쪽으로 가나 작고 큰 불상들이 고요하게 자리 잡고 진한 향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

 

밖에서 다시 한번 동굴과 산을 쳐다보니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산이다.

산 전체가 대리석이기 때문에 일명 마블 마운틴이라 불리기도 한다. 과거에는 산 전체가 섬이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간 너무 신기한 산이다. 마침 타잔 나무뿌리가 바위 아래 길게 뻗어 늘어져 있어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전망대도 있는데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망해대와 다낭 시내의 강을 바라 볼 수 있는 망 강대가 있었다.

 

Ⅳ 미션 참파 유적지

 

 

 

 

 

 

 

 

 

 

 

 

 

 

다음 날은 호이안으로 가서 미션 참파 유적지를 둘러볼 작정이다. 이곳은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베트남 중부지방을 참파족이 점령했던 곳이다. 12세기경에 베트남족은 이 지역에 정착하고 있던 참족과 싸워 마침내 그들을 멸망시켰다.. 나는 여기에서 베트남 민족이 약한 민족이 아니라 과거 중국과의 전투에서도 이기고 참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한 용감한 민족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 했던가? 책에서 보고 매스컴을 통하여 들은 내용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직접 와서 보고는 알게 되었다.

참파족은 지금은 베트남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에는 아주 번성하였던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4 - 참파 유적의 기울어진 모습

그 유적이 이런 정글 속 깊은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적색 벽돌로 쌓은 대부분의 건축물은 형태만 유지한 체 기울어져 있거나 전쟁 중에 많이 파괴되어 흉물처럼 부서진 체 방치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보인다.

사진 5 -유적지 경비원과 함께

 

 

 

 

 

 

 

 

 

 

 

 

그러나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하여 군복을 착용한 사람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대다수의 관광객이 한국인이다..

 

머리에 농라를 어설프게 쓰고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정담을 나누는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오가고 있었다.

 

 파괴된 참 파유적지는 그나마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수의 관광객이 찾아와 그 흔적을 보고 가는 명소가 되었다. 다낭 시내에 위치하는 참파 박물관도 개관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산의 초입에서 입장권 발매 순서에 준하여 전동차를 타고 유적지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또 관광을 마친 사람들은 본래의 위치까지 이동해 주는 역할은 젊은 아가씨들이 담당했다. 이 날에도 유럽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이었다. 또 인근에는 허름하지만 아담한 공연장을 만들어 시시로  전통 춤을 추는 것으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유적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우측면에 공연장이 있었다. 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나무들은 고엽제에 기인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야윈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동차에서 내려 유적지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 참족에 관하여 질문하고 답을 들었다.

보통 참족(Chamic people), 짬족이라고 한다. 넓게는 하로이족, 라데족, 츠루족, 로글라이족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참족은 원래 Malayo-polynesian 계로 기원전 190년 인도네시아계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세기경 베트남으로 건너와 후에를 중심으로 붕따우와 짱랑(phan lang) 지역에 걸쳐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고대 산스크리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안남(현재의 베트남) 중부지방을 정복하고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해적으로부터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소극성을 보이다가 전성기에는 당시 동남아 지역의 맹주였던 크메르 앙코르 왕국을 침략하며 크메르와의 뺏고 점령당하는   치열한 전쟁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참 파 왕국이 크메르 왕국을 점령하여 통치한 기간은 4년인데 비하여 반대로 크메르 왕국이 참파 왕국을 다스린 시기는 37년에 달한다.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강력한 참 파제 국을 형성했던 것이다. 서기1471서기 1471년 베트남인들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당하면서 약 250만 명의 참족들이 터를 잃고 잠령 군의 대량학살을 피해 안도 차이나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4차에 걸친 집단 망명으로 캄보디아로 이주한다. 당시 태국 아유 타율 왕조의 침략으로 인해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이용 캄보디아로 이주해 온 참파족의 지배층 및 왕족은 약 60만 명으로 추산한다.

 

캄보디아에 들어와 현재의 가락국수이라는 지역에 터를 잡은 후 캄보디아 국왕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참족은 메콩 강과 바싹 강을 따라 자연스럽게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지금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371개의 참족 마을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소수종족이 되었다.

 

캄보디아 참족은 가정에서 외삼촌이 권위를 갖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성에 의해 혈통이 이어지는 모계중심의 사회로 남자가 결혼하면 처가에 들어가서 사는 풍습이 전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많이 사망한 연유로 그럴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들에게도 비극의 역사는 있었다.

베트남의 참족은 대부분 전통적인 힌두교와 기타 종교를 신봉하나 캄보디아 참족은  자기들의 언어와 이슬람이라는 종교로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75에서 1979년 사이 크메르 루주 정권의 참족 대학살이 있었다. 당시 약 10만 명의 참족이 살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작은 집단으로 흩어졌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참족 사람들을 무작위로 체포하고 살해했다.

자신들의 모국어인 짬 어를 사용금지당했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식품으로 금기시되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다.

 

세상의 흥망성쇠는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자유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할 것이다.

 

유적지 일대를 찬찬히 세세하게 살펴보고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연발했다. 그 정교함과 예술적 건축미에 매료되었다.

 

길가에는 야생화가 피어 관람객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산마루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또 발동하여 민속공연장에 들어가 보았다. 사람들이 가득 자리를 메워 우리는 맨 뒤에 서서 관람하였다. 특유의 의상으로 민속춤을 흥겹게 추고 있었다.

그림 6 베트남 민속춤 공연

 

 

 

 

 

 

 

 

 

 

 

 

 

 

 

 

 

 

 

 

베트남 사람들도 어느 민족 못지않게 흥과 여유가 있다는 것도 새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도보구간을 지나 휴게실 근처에서 전동차를 타고 매표장 앞으로 돌아왔다.

 

 

. 바나 힐 국립공원

 

 

 

베트남 다낭에 오면 반드시 한 번쯤은 아니 필수코스로 가 볼 곳이 있다면 단연 바나 힐 국립공원을 꼽는다.

해발 1500미터 산꼭대기에 아방궁 같은 신세계가 있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사람도 엄청 많고 다양한 외국인들이 관광을 즐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바나 힐 국립공원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그 관료들이 무더운 베트남 날씨를 이기기 위해 건설한 휴양지로 약 100년100 전에 만들어진 휴양지가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파괴되었다가2007년 경 Sun 그룹이 투자 개발하여 다낭의 최대 관광지로 회생시켜 Sun world Ba Na Hills Hills라는 이름으로 ‘중부지방의 유럽’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베트남인들의 노역으로 이루어진 슬픈 역사가 숨 쉬는 곳이지만 그래도 옛날의 모습을 많이 복원하여 현재는 다낭에서 가장 화려한 관광지로 각광받는다는 유명한 곳이다.

 

 

우리 일행은 여유롭게 살피기 위하여 오전에 일찍 서둘러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고급 호텔과 다양한 식당, 편리한 쇼핑센터, 현대적인 놀이기구와 특별한 예술 공연 활동 등 완벽한 서비스 시스템을 갖추고 전 연령층 관람객에게 적합한 게임, 오락시설을 완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삼성 에버랜드와 유사한 어떤 놀이동산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진 7 – 바나 힐 정상부 전경

버스에서 내려 보니 우선 조경이 잘 조성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전면에는 중국의 자금성과 비슷한 건물도 보이고 연못과 물고기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품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바나 힐 성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대포가 양문으로 버티고 서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 통로는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게 차양시설이 이어져 있어 시원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가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열대식물과 나무들이 물을 머금고 있으니 더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케이블카를 탔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았지만 나는 구석에 앉아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창밖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관찰하고 싶었다.

정상의 높이는 약 1500미터로 20 분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 카라고 소개했다.

 

발아래 넓은 주차장에는 수많은 차들로 조밀하게  채워져 있었고 구경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연못도 있고 물가의 둑에는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는다. 서서히 케이블카가 오르면서 정글의 광활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장막을 연다.

 

오래된 고목도 즐비하고 검은 바위와 작은 폭포들도 많아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이색적인 밀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어디선가 침향나무에 상처를 비비던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며 출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글도 근접한 공중에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케이블카는 굽이굽이 구간마다 요동쳤다. 여자들과 고소공포증 환자들은 물체를 붙잡고 무서움에 괴성을 질렀다. 마치 은하철도를 타는 것처럼 스릴이 있었다. 감단을 연발하는 사이에 정상에 다다랐다.

 

듣던 그대로 정상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유럽여행을 온 느낌이다.

베트남의 마을과는 전혀 다른 지붕이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옛날의 성이 있는 유럽 프랑스 마을(French Village)의 분위기를 살려 테마파크로 변경시킨 것이다.

 

 

중앙에는 광장이 있고 분수대가 자리 잡아 여러 조형물과 더불어 금붕어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6 km나 되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분수대 근처에서 만나 식당이나 위락시설로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도 한 시간의 자유견학 후에 분수대 앞 돌아가는 지구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분수대를 지나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가니 금색 반구형의 큰 건물을 만난다. 여기가 바로 비어 플라자(Beer Plaza)3층 건물 전체가 식당이다. 가운데는 무대와 음악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음식의 종류도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하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3,000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난간에 붙어 있는 조명과 내부의 꽃장식이 실로 장난이 아니다.

 

프랑스 마을에는 포도주 저장고도 보였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프랑스인들이 영원히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으로 알고 이런 곳에 거대한 시설을 만들어 희희낙락하였지만 호찌민 같은 사람이 나타나 나라를 독립시키는 일에 지대한 역할을 해서 현재 베트남은 엄청난 도약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설을 완료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억울하게 죽어 갔는지를 생각하니 문득 일제에 억압받은 우리의 선조들이 생각났다. 다시는 굴욕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 힘을 기르고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인들의 슬픈 역사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프랑스 마을을 지나 천천히 사람들이 올라가는 방향으로 따라 위로 올라가니 린 풍띠엔뜨 사원으로 올라가는 꽃으로 장식된 계단이 보였다.

 

석주 문을 지나 썬 월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자를 왼쪽으로 돌아

사원(Linh Chua Linh Tu Temple)에 도달했다.

측면에는 자비와 복을 상징하는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는 포대화상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헤아려 보니 9층으로 된 린폰 탑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있어 잘 어울린다.

린폰 탑 아래에는 양정(陽亭)이라고 쓰여 있는 단아한 건물이 있는데 마당이 아름다운 조경으로 설계된 찻집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은 프랑스 식민시절 지어졌던 건물을 개축하여 수리하거나 재건축하여 호텔, 레스토랑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보였다. 성 테니스 교회(Saint Denis Church)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다. 수리 중이라 들어가서 볼 수는 없었다. 오른쪽에 위치한 파리스 호텔(Hotel de Paris)은 성처럼 보였다.

 

다음은 판타지 건물 지하로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 보았다. 가지가지 게임시설과 놀이시설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마의성, 미로방,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등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놀이시설이 층층이 정돈되어 있었다.

구경할 곳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여 다시 초입으로 내려가는 10인용 케이블카를 탔다.

 

내려오는 중간 환승지점에 두 손위에 올려 있는 황금색 다리가 있다.

골든 브리지로 불리는 이 다리를 보기 위해 환승역에서 일행이 함께 내렸다.

20186월에 개장하여 개성 있는 외관으로 바나 힐에 오는 관람객이 꼭 들리는 명소가 된 이 다리는 해발 1400m 위에 거인의 두 손으로 다리를 받들고 있는 모형으로 세워진 다리이다.

 

거인의 두 손이 황금빛 공중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이런 다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묘하고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12,4m, 길이 150m8개의 경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확 트인 전망을 즐길 수가 있으며 역시 조경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사진 8  -골든 브릿지

 

국내에서 흔히 만나는 꽃 수국,  뉴기니아 봉선화도 활짝 피어 미소 지으며 우리를 반겨 주는 것 같았다.

오늘은 운무와 함께 더한층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다시 케이블카는 우리들을 태우고 아래로 하강했다.

가이드는 베트남에 오면 이곳을 또 찾아 달라고 청하면서 정확하게 해발 1,487m인 바나 힐은 하루에 4계절을 모두 체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침은 봄, 정오는 여름, 오후가 되면 가을, 밤이 되면 겨울 날씨라 한다. 평균 온도는 섭씨 17도에서 20도 사이를 오간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은 1859년부터 계속해서 프랑스 군의 침략을 받았고 결국에는 1883년 아르망 조약으로 마지막 응우엔 왕조는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2차 대전 중에는 일본, 이탈리아, 독일의 나치 동맹군 중 일본군이 베트남에 강제 진입하여 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는 다시 프랑스가 이곳으로 진출하였다.

 

그 후 1946년부터 19541954년까지 소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프랑스가 물러나고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호찌민 민주공화국이 들어서고 남쪽은 미국의 지원 아래 오딘 지엠 베트남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19767월 베트남이 통일될 때까지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 등의 외세를 겪은 것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 하이반 고개

 

호이안으로 가는 길목에 투본 강줄기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이상한 동네로 들어갔다.  베트남 중부의 전형적인 어촌 코코넛 마을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보니 광주리 배(BASKET BOAT) 사업을 하는

점포들의 안내판이 보였다.

 

바구니 배는 투옌 퉁(커다란 바구니), 까이퉁까이퉁(Cai Thung), 까이뭄(Chai Mum), 퉁 보이(Thung Boy) 등으로 불린다.

바구니 배는 본래 해안가를 오가는 데 사용했던 운송수단이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거나 물건을 나르는 일에 유용하다. 지금은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어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주차장에서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에 나는 황당한 일을 체험했다. 배 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앗’ 비명을 질렀다. 다름 아니라 신고 가던 등산화의 밑창이 순간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남의눈을 피해 비상조치를 취하여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신속히 끈으로 묶었다.

 

“아마도 신발을 너무 오래 신고 다녔나 보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검소라는 미명 아래 신발을 너무나도  학대한 결과라 생각하며 바보처럼 빙그레 웃었다.

‘극한 속에서 여유를 찾으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발바닥이 아파 오는 통증을 참으며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절룩거리며 이동했다.

 

 바구니(광주리) 배는 베트남 전통 배라고 설명했다.

일명 바구니  말 그대로 대나무처럼 생긴 코코넛 나무(야자나무 잎)와 기타 나무 잎을 이용 바구니처럼 짜서 광주리 모양을 만든 후에 소똥으로 방수처리를 해서 완성한다고 했지만 물도 안 새고 소똥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요즘은 FRP 소재로 코팅 처리하여 보다 내구성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구명 조끼도 착용하고 농라를 머리에 쓰고 끈으로 야무지게 메고 배를 타니 노를 저어주는 사람(뱃사공, 노꾼:(뱃사공,노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있음))이 우리를 전면으로 서서히 이동시켰다.

 

수많은 바구니 배가 좁은 수로를 따라 물 위를 떠다닌다. 관광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 트로트 유행가와 댄스곡이 환호성과 동시에 들려왔다.

관광객의 대다수가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 가요 연습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강남스타일’ 등의 노래가 베트남 하늘 아래에서 들린다.

우리 가이드도 흥에 겨워 슬그머니 춤을 추기 시작했고 모든 베트남인들이 차례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바구니 배도 힘차게 출렁거리며 일렁이고 있다. 바구니 배의 특성상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리기 쉬운데 그래도 저렇게 빠른 속도로 돌리니 배가 뒤집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린다.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낌없이 춤을 추는 모양이 장관이다.

 

한국인들은 씀씀이 넉넉하게 팁을 내놓는다.. 위험한 것도 잊은 체 물 위에서 벌어지는 바구니 배의 향연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나루터 측면의 풍경은 전형적인 베트남의 고요한 모습이다. 여기저기 월맹의 홍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코코넛 나무가 즐비하여 여기가 열대지역임을 자연의 분위기로 표시한다.

 

어떤 에이스로 보이는 사람이 배를 심하게 돌리며 댄스를 하는 광주리 배 쇼가 끝나고 일정액의 팁이 거출되면 노래가 멎고 사방이 조용해진다.. 그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물도 흙탕물인데도 불구하고 바구니 배 타는 놀이가 색다른 맛이 있어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군데에 고기를 잡는 어부도 목격되었다.. 배를 타고 나와서는 이어서  찻집으로 안내되어 잡담을 나누며 코코넛 차를 마셨다.

베트남은 사람들이 죽으면 분묘를 강가에 많이 설치한다고 한다. 살았을 때에 더위에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돌아가시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강가로 모신다는 의미라고 얘기하였다.

 

 

 

 

. 하이반 고개

다음 행선지는 하이반 고개이다. 하이반은 ‘바람과 구름’이라는 뜻으로 항상 구름에 가려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알려 주었다.

 

디스커버리에서 세계 10대10 비경 중의 하나로 꼽혔다는 이 고개는 해발 900m, 길이 약 20km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날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랑코 해변의 경치가 참으로 멋진 곳으로 풍광이 수려하다고

느껴진다.

 

 

가이드는 이 해변에서 오리지널 진주가 전쟁 유가족을 중심으로 생산된다고 설명했는데 고개에 있는 매점에 가니 진주 목걸이와 진주로 장식된 반지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고개 좌우에는 성문 같은 초소(방카)가 그대로 있는데 총알 뚫린 자국이 많아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을 대변하고 있다.

하이반 고개는 베트남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북부와 남부를 이동하는 요충지로 중요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당시의 전황을 상상하며 초소마다 올라가서 한참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월남 전쟁 당시에 우리의 귀신 잡는 무적해병 청룡부대가 한때 이 고개에 주둔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우리 용사들도 많이 전사한 곳이라고 전한다.

전쟁은 피아를 막론하고 상처를 입힌다. 도로 옆에는 위령비도 있었다.

 

나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치고 산화하신 선배 장병들에게 충심으로 머리 숙여 묵념을 올렸다.

먼 남쪽 월남이라는 남의 나라에 와서 장렬히 전사한 그분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산 아래로 기차가 그림처럼 지나가는데 한 마리의 긴 뱀이 꿈틀거리며 사라지는 모양새와 많이 닮았다. 이상하게도 여기 기차선로는 우리나라처럼 복선이 아니고 단선(외선)이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사고가 많이 나지요?”라고,,,  그는 서로 연락을 해서 “내가 이쪽에서 그쪽으로 몇 시에 가니 잠시 서 있어라”라는 등 서로 통신으로 정확하게 교차를 해서 아직 큰 사고는 없었다고 강변했다.

 

산에는 나무들이 많았지만 전쟁과 고엽제 영향인지 고목은 볼 수가 없고 비교적 가느다란 나무들로 분포되어 있었다.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은 외길로 반드시 남과 북의 경계지역인 하이반 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다. 지금은 6km의 긴 터널이 뚫려 있다고 한다.

하이반 고개 표지판에  남북의 중심지라는 표시가 서 있었다. 세게 10대 비경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절경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설명도 들었다.

 

따라서 전쟁 시에는 이 고개를 선점하기 위하여 무수한 희생을 치렀던 지역이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약 30km30km 지점 떨어진 부글 리강 어귀의 남중국해 연안에 위치한 가까운 호이안에 우리나라 청룡부대 본부가 있었다고 들었다.

 

해병 제2여단 주둔지에 지금은 허물어진 문주만 두 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해병 마크 아래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해병 제2여단 기지’라고 적혀 있었다 한다. 호이안은 꽝남성 동북부에 위치한 곳이다.

 

나는 이 번 탐방에서 우연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베트남 현지인으로부터 19680119일에 이루어졌다는 ‘꽝남성 대학살’에

대하여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따이한(한국군 지칭)이라고) 하면 유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몸서리친다고 했다.

따이한이 월맹군 구정공세 이후에 마을에 진입하여 여성, 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하광에 가면 위령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유가족 대표가 강당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면서 “원수의 따이한을 자손만대로 잊지 말자.”라고. 힘주어 강조했다고 전했다.

헤아려보니 50년이 흘러간 그 당시 무고한 민간인 무차별 학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죄인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한국이 베트남의 제11 경제 투자국으로 서로 교류하고 한국 관광객들이 베트남에 많이 오니 어쩌면 잠복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표면으로 문제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전사가 있지만 또한 너무도 아름다운 호 이반 고개에서 2시간을 머문 후 우리는 후에로 출발했다.

 

 

. 후에 왕궁

 

후에는 특별히 관심이 간다. 내 고향 경주가 천년고도라고 불리듯이 후에는 옛 응우엔 왕조의 수도이자 베트남의 정신적인 수도로 두 도시가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070907일 두 도시 간에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문화교류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으며,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된 이후부터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월남과 월맹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왕궁도 손상을 입어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1990년대 최근 들어 지방 정부가 후에 왕궁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93년에 베트남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후에 궁중음악 또한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지금 인구는 30여만 명이지만 앞으로 경제 문화 의료 교육 중심의 국제적인 도시로 승격할 도시라 한다.

 



1687년 후에에서5km 북동쪽에 있는 바오 빈(Bao Vinh) 마을에 도시의 성곽이 건설된 이후 1744년 응우옌 씨()를 가문으로 하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1802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가 후에를 수도로 정하였다. 1885년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왕실로부터 거부당하자 후에를 포위했다. 프랑스 측 자료에 따르면 3일간 지속된 후에 공격에서 왕궁 장서각을 파괴했고, 고가의 귀중품을 훔쳤다고 전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월남과 월맹이 차례로 후에를 탈환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이 살해되는 살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후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유적지 관광이 가능한 도시이며 그래서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후에는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와 남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며 짱 띠엔 다리와 푸 쑤언 다리가 양쪽을 잇는다.

구시가지에는 왕궁 등 응우옌 왕조의 유적지가 있고 동 바 시장이 있다. 신시가지에는 호텔, 레스토랑, 토산품점, 여행사가 밀집되어 있다. 흐엉 강을 따라 남쪽으로는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후에 왕궁 주차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새로운 가이드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신장이 좀 작은 통통한 청년이 환영인사를 하고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죠?”라고 말했다. 재빠른 한국인이 “후에 왕궁 앞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아스팔트 위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한국의 광주 인근에서 근로자로 일하며 몇 년간 한국에 체류한 경력이 있어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래서 한국말로 농담도 잘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그 청년 덕분에 재미있게 왕궁 일대를 탐방할 수가 있었다.

 

왕궁은 가로 2km, 세로 2km의 성벽으로 조밀하게 쌓여 있고 성벽 밖으로는 흐엉 강에서 들어온 물로 채워져 있었다. 우선 깃발 탑이 눈에 들어왔다.. 월맹의 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3층으로 된 기단 위에 설치된 깃발 탑은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37m라고 한다.

 

그 앞의 잔디 광장은 큰 행사를 치를 때 이용하며 의전 의식을 할 때 이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왕궁 안에는 동서남북중 5개의 문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남쪽 문으로 들어갔다. 남문과 태화전 사이에 있는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많았다.

중국의 자금성을 모델로 건축했다는 태화전 전경은 단아하게 보였다.

태화전 앞에는 해태와  유사한 동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회의를 할 때 어느 신하가 졸고 있는 지를 감시한다고 가이드가 재치 있게 설명하여 한바탕 웃었다.

 

용 모양의 성스러운 상상의 동물이 떠받치는 계단을 따라 태화전으로 가니 품계에 따른 신하들의 배 치석이 있었다. 태화전은 후에 왕궁의 정전이며 국사를 논의하는 곳이다.

 

 

 

우리나라 종묘와 같이 역대 응우엔 황제의 위폐와 개국공신을 모셔놓은 곳도 있는데 폐위된 2명의 황제와 바오다이 황제의 위폐는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도 닮았다고 느껴졌다. 현판이 현임각이라 적혀 있는 곳에 들어가는 양쪽 초입에는 코끼리 비슷한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종묘 앞에 배치된 향로는 1835년에서 1837년 사이에 주조한 세발 달린 솥으로 무게가 각각 2.7kg에서 1.6kg으로 엄청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솥은 왕권을 상징하며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 가운데 것이 자룡 황제의 것이고 나머지는 여덟 황제의 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또 둘러보니 궁중 안에 대포가 아홉 문 있었다. 마지막 왕조 즉위 다음 해, 1803년에 일 년 만에 대포를 모두 만들었는데 사계절(춘하추동)과 오 원소인 금목수화토의 오행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각각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고 만든 내력을 상세히 적어 두었다.

 

2대 민망 왕 시기에 완성된 이 왕궁은 흐엉 강 북 쪽을 향하고 있으며 프랑스 건축가인 바우반의 설계에 따라 프랑스식과 베트남 그리고 중국식이 혼합된 건축양식이라 추측된다.

 

왕의 거주지인 흐엉 딴(Hoang Thanh)은 커다란 궁전이란 의미로 다이 노이(Dai Noi)라고 부른다.  다섯 개의 문 중 중앙 문은 왕만이 출입하였다고 한다.

‘뚜 깜 딴’은 총 1,225km에 달하며 7개의 문이 있고, 왕과

 

왕궁 내의 주요 건물을 내부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나머지 건물은 너무 광범위하여 전동카를 타고 둘러본 후에 북문으로 나왔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했다.

 

왕궁을 나와서 버스로 약 3km 지점,3km지점, 불과 5분 거리에 티엔무 사원이 있어 정차시키고 둘러보기로 했다.

 

1601년에 세워진 티엔무 사원(Thin Mu Pagoda) 입구에는 높이 21m  8각형 7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이 석탑은 1884년 티에우 찌 황제가 세운 것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큰 석탑이라고 했다. 석탑 오른쪽 정자 안에는 거북이 석상 위에 사원의 역사를 기록한 석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석탑 뒤로 돌아가니 사천 와을 모신 법전이 있고 영모사(靈姥寺)라고 쓰인 현판이 보인다. 응우엔 왕조의 건국 전설과 관련이 있다.

 

하늘에서 신비한 여인이 나타나 곧 군주가 와서 이 곳에 탑을 세울 것이며 이는 새로운 나라의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지방 군주이던 응우엔 호앙(자롱( 황제의 선조)  신비한 여인인 천 모가 나타났던 그 자리에 사원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티엔무 사원이라 전한다.

 

법전으로 바로 들어가면 대웅전이 나오고 그 뒤로 가면 아름다운 연못과 빼어난 정원을 지나 희한한 꽃향기에 취하면 어느새 남색의 오래된 자동차 한 대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차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 불교탄압에 항의하기 위하여 분신자살을 목적으로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갈 때 수도승 틱 꽝득(Tich Quang Duk) dl타고 갔던 차라고 한다.

스님은 그때 많은 국민과 경찰과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가 기름을 붓고 몸에 불을 댕기자 가부장 자세로 앉아 목숨을 다할 때까지 미동도 없이 타다가 결국 뒤로 쓰러졌다.

그 스님은 소신공양(분신) 전에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앞으로 쓰러지면 이 나라는 미래가 없으니 모두 떠나고, 만약에 뒤로 넘어지면 투쟁하면 승리할 것이니 끝까지 싸우라. “는. 유언을 남겼다.

역사적인 현장의 영상은 그때 전 세계에 생생한 특보로 실시간 전해졌다.

 

 

이 사건 이후에 베트남 정부는 결과적으로 불교를 허용하였다고 전한다. 또 입적 후 화장을 하였으나 심장은 타지 않았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마음이 처연해졌다..

우리나라의 이차돈의 순교와 대비되는 대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펴보니 중국 불교의 흔적이 묻어나는데 특히 본인이 답사한 남방불교의 색채가 강하다고 느껴진다.

 

. 까오다이교 사원과 대성당

 

유서 깊은 고적 도시 후에를 떠나 다낭으로 이동하여 바로 까오다이교 사원에 들렸다. 흔히 볼 수 없는 색다른 종교문화를 탐방하고 싶었다.

나는 까오다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질문해 보니 까오다이는 ‘높은 곳’ 이란 뜻이라고 했다. 즉 신이 통치하는 정신적으로 높은 곳,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까오다이교는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절충한 독특한 종교라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불교의 윤회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금욕, 살생금지, 선행과 자비로운 삶을 실천토록 한다.

 

1926년 베트남 남부에서 까오다이교는 토착 종교라 해도 틀리는 말이 아니다. 총본부는 호찌민시에서96km 떨어진 떠이닌 지역에 있다고 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던 이유로 베트남 통일 이후 한 때는 종교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약 400만 명의 신자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여기 다낭의 까오다이교 사원은 1956년에 건설되었으며 3층 누각의 첨탑과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원을 출입할 때 기본 규칙이 몇 가지 있다. 한국인이 많이 오기 때문에 한글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먼저 복장은 단정하게 입어야 하므로 반 반지 등 노출이 심한 옷은 삼가야 한다. 그리고 금연과 금주는 기본이고 쓰레기 투기와 고성 등 기본적 예절을 중시하는 것 들이다.

 

 

특히 들어갈 때 왼쪽 문은 여성만 출입하고 오른쪽 문은 남성만 출입하므로 착오가 없어야 할 것이다. 사원 내부의 중앙제단은 신성시하고 중앙에 눈이 새겨진 둥근 원형의 물체가 있는데 천안은 까오다이교에서 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역시나 인류 구원의 날에 천안이 나타난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까오다이교 사원의 종교문화 탐방을 마치고 다낭 일정의 마지막은 인근에 위치한 다낭 대성당을 찾아갔다. 외부에서 보니 웅장하고 교회 건물같이 느껴졌다. 입구에서 천천히 들어가니 정원이 아름답다. 1923년 프랑스 통치시기에 건축된 성당으로 풍향계가 돌아가는 독특한 성당으로 현지인들은 친 또 꽁가(Chinh Toa Con Ga) fk불렀다.

 

분홍색 외벽이 인상적이다. 내부에 들어가니 아름다운 글라스로 색상을 넣어 장식되어 있다. 화단에 심어진 자주색 꽃이 너무 아름다워 두 포기를 얻어 한국으로 가져와 번식시키고 있는 중이다.

 

간단하게 다낭 대성당을 살펴보고 숙소로 이동하면서 창창 밖을 응시했다. 어느 운동장이 협소한 초등학교를 지날 때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려 의아했었는데 알고 보니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큰 북소리라 했다.

 

기실 나는 다낭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에 가고 싶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추앙을 받는 그의 생애를 한 번쯤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남긴 체 여정을 마감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었다.

 

 

 

. 맺음말

 

 

나는 금 번 베트남 문화탐방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유의미한 시간이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싶다.

베트남에서 보낸 일주일간의 생활이 짧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은 참으로 친절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그들은 좋은 말을 하던지 싫은 말을 하던지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비록 단편적이지만 본인이 진심으로 느낀 몇 가지를 나열해 본다.

 

첫째,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서 들었던 알고 있는 지식과는 상반되게 똑똑하고 예술문화 부문에서 특출한 재능이 있다는 것, 특히 정이 많고 근면하며 강인하고 용감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어릴 때 안남미(월남 쌀)로(월남쌀) 밥을 지어먹을 때를 분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때 이야기 듣기로는 월남은 날씨가 무더워 사람들이 무척 게으르다고 전해 들었는데 실제 탐방 후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둘째 월남전쟁의 비극과 명암을 일부나마 확인하고 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결과 참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은 우리의 원수의 나라다. 만년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는. 한 노파의 뼈에 사무치는 울분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가해자는 잊어버려도 피해자의 상처는 오래오래 기억된다는 진리를 알아차렸다.

마치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본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듯이 말이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부터라도 베트남 사람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본인의 견해이고 작은 소망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베트남 사람들을 가장 존중한다. 최근에 한국어 교사 (문학사)를 취득하면서 베트남 유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성의 있게 대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에 가서 진심 어린 선물을 사서 전달하기도 했다.

이유 불문하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셋째 베트남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현재 빠른 속도로 고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체험했다.

이러한 초고속 성장은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에 지체하고 있는 한국의 경제를  추월할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된다.

 

넷째 경주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왕궁터가 있는 고적 도시 후에와 문화예술에서부터 경제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교류협력 사업을 진전시켜 보다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섯째 우리나라도 경주의 형산강과 대구의 금호강 같은 좋은 자연자산을 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를 들면, 베트남의 중부 도시 다낭이다.

 

사진 11- 베트남 한강 주변의 야경

 

다낭 시내를 흐르는 강 이름이 한강이다. 최근에 놓인 다리가 용 다리인데 산책을 나가 살펴보니 용머리에서 불을 뿜는 불쇼를 하고 있었다. 온 천지 사방에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지고 크고 작은 유람선이 떠다닌다.

 

몇 개의 다리마다 불이 켜지고 다리 아래로 배가 왕래하는 모습은 요지경 세상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유람선마다 베트남 무희가 나와서 노래를 하고 춤도 춘다. 그리고 선상에서 야간 약혼식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여기저기 보였다.

강변에는 야시장이 열리고  어느 카페에서는 마침 축구경기가 열려 맥주를 마시고 T.V를 시청하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응원현장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도 전국의 아름다운 강을 베트남처럼 용감하게 개발하여 관광 상품화할 수 있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제시해 본다.

 

 

 

 베트남에서의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정을 모두 마치고 다낭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남중국해를 거쳐 한국으로 오는 사이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꾸만 떠오르는 모습이 고기의 가시처럼 가슴에 턱 걸린다.

이틀 전 허름한 재래시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쟁으로 인한 상이군인으로 보였는데 손도 없고 다리도 다쳐 겨우 걷는 장년의 남자가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나무랄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한국 군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시장을 누비고 다니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한국인을 바라보는 원망스러운 으스스한 그의 눈빛이 화살촉 인양 아프다.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베트남 전쟁의 아픈 상처가 깨끗이 잊힐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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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하기 후에 왕궁(Hue Grand Palace, Dai Noi Hue

1805년 자롱 황제의 명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18321832년 왕의 서

 

 

 

 


1)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는 미국, 대한민국,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 6개국이다.

단어형성법 대조, 그 차이점과 공통점 설명

우선 단어란 자립성을 지닌 최소한의 의미단위입니다.  여기서 자립성은 그자체로 홀로 사용할 수 있는 성질로 돌, 바위, 집 등은 단독으로 말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지만, ‘먹었는데’에서 ‘먹’과 ‘었’ 그리고 ‘-는데’는 따로 하면 이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 최소한의 여건을 갖춘 것을 우리는 단어라고 한다.

이러한 단어형성법을 살펴보고 이어서 영어 등 다른 언어의 단어형성법을 대조하여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 본다.

 

어떤 말이 품사로 분류가 되면  단어이고 이런 것을 어휘형태소라 하고 ‘-()ㄹ줄 알다/모르다’와 같은 연결어미와 파생접사는 문법형태소이다. 특히 한국어의 조사는 단어이다 하지만, 기능을 담당하는 문법형태소에 속한다.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내용어로 어휘형태소와 일치하고 그리고 내용어 외에는  기능어로 분류 되는데 이는 문법적 기능을 담당하고 대부분 문법형태소와 일치한다.

 

또한 자립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형태소와 의존형태소로 나눈다.

자립형태소의 예는 달, , 아버지, 별장, 아주 등을 들 수 있고,

의존형태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먹고 같은 용언의  어간과 ‘-/가’‘- /를’ ‘-/는’과 같이 명사 뒤에 붙어야하는 조사 또는 ‘풋(사랑)’‘(욕심)-쟁이’등과 같은 접사가 해당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단어가 문법적 자립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명사는 대부분 자립형태소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의존형태소인 경우도 있다.

고대 그리스어의 명사는 격을 나타내는 접사와 함께 실현되어야 하므로 의존형태소인데 한국어 용언의 어간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으니+어서)에서 먹이 먹다의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먹만으로는 사용을 못하기에 의존형태소이다.

 

기능에 따라 분류해 보면, 한국어에서 ‘먹고, 먹으니, 먹어서, 먹으면’과 같이 먹-에 의존형태소가 붙은 경우에는 ‘음식물을 입에 넣다’라는 뜻은 그대로 있고 동사 어미활용에 의해 형태만 변하지만, ‘먹이’의 경우에는 동물사료와 같이 본래의 의미가 확장 혹은 변화 되었으며 품사도 동사에서 명사로 바뀐 예가 된다.

영어의 worked- worker도 도사에서 명사로 바뀐 같은 경우의 예다.

 

다음은 문장과 관련된 굴절형태소와 파생형태소에 대하여 살펴본다.

문장에서 각 성분들의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어 문장과 관련된 문법정보를 알려주는 굴절형태소의 예를  들어보면,

어미‘--’은 시제가 과거임을 알려주고 조사‘을/를’은 선행하는 명사가 목적어임을 알려주는 것이 한국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어는 -(e)s'는 주어가 3인칭 단수이며 시제가 현재임을 알려 준다.

 

두 형태소의 차이를 설명해 보면,

 

굴절형태소는 대립어 범례를 흔히 보이지만도 파생형태소는 그렇지 않다.

대립어 범례란 모순되는 의미나 기능을 가진 서로 배타적 형태소들의 집합을 말하는데 예로 시제표지가 있다.

서로 다른 두 시제가 한 동사에 동시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상당하는 시제표지 형태소도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배타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과 ‘--’은 같이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파생형태소는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굴절형태소는 의미를 예측하는 것이 파생형태소보다 쉽다.

 

영어의 굴절형태소 비교급 '-er'의 의미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파생형태소 '-er'은 어떤 단어에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 낸다.

예를 들면 teach-er, toast-er,  New Yorker, draw-er 등을 들 수 있다.

 

굴절형태소와 파생형태소의 함의관계는

굴절이기본이고 굴절이 있는 단어에는 반드시 파생형태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조사와 어미가 매우 발달 되어 상대적으로 영어나 중국어보다 굴절형태소가 많다. 그리고 영어는 굴절형태소의 수로 비교해 보면 스페인어나 러시어어 등 다른 유럽어에 비하여 적은편이다.

 

이어서 한국어와 영어의 접사를 살펴본다.

접사 중 가장 흔한 것이 접두사와 접미사이다.

한국어의 접두사는 ‘헛-소리,-밟다, -높다, -과일’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영어는‘in-correct, re-play, pre-fix, en-large’ 를 들 수 있다.

접미사는  한국어는 ‘존경-하다, 부모-, 나무-, 공손-히’를 예로 들 수 있고

영어는 'parent-hood, journal-ism, social-ize'를 예로 들 수 있다.

접사의 종류에 따른 함의관계는 접미사>접두사>접요사>접환사로 표현할 수가 있다.

 

단어는 기본적으로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누고 복합어는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뉜다.

합성어는 둘 이상의 어근(어휘형태소)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구조의 단어로 한국어와 영어가 유사하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돌탑, 돌다리, 벽시계, 돌아가다’와 영어의 house-wife, high-light가 있다.

파생어는 어근에 접사가 결합하여 파생구조의 단어로 한국어의‘드-높다,-복숭아’영어의 sing-er, moralize 등이 있다.

 

다음은 한국어와 영어의 파생대조를 살펴본다.

먼저 품사유지 파생은 한국어에는 ‘짓-밟다, -쓰다, -돌다, 부채-, 선생-님 등이 있고, 영어는'dis-count, dis-continue, dis-trust'등이 있다.

 

품사가 변화되는 파생은 한국어는 명사에서 동사로 변화되는 것은‘공경-하다, 연마-하다’등이 있고 동사에서 명사로의 변화는 ‘먹이, 마중, 죽음이 있다. 명사에서 형용사로 변화되는 것은 ’학생-답다, 지혜-롭다, 가난-하다‘가 있으며 형용사에서 명사로 변화되는 것은 ’넓이, 크기, -둥이 등이 있고 형용사에서 동사로 변화되는 것은 ‘높-이다, -히다, -추다’등이 있으며 동사에서 형용사로 전환되는 것은 ‘믿-덥다(미덥다), -브다(기쁘다)’등이 있다.

우선 ‘정답다’를 표준어 사전을 찾아보니 ‘따뜻한 정이 있어 마음이 포근하다.’의 의미로 쓰이며 그 활용은 정답고, 정다운, 정답기로 되어 있다.

학생답다는 ‘학생의 성질이나 특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답’은 본인의 소견으로는  일부의 체언 다음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그 체언에 합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라고 생각합니다.

 

‘정답다’의 ‘답’과 ‘학생답다’의 ‘답’의 차이를 살펴보면,

1) 어디까지나 본인의 소견이지만 ‘정답다’는 의미의 변화가 없지만 ‘학생답다’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미세한 의미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머니와 딸, 혹은 자매간, 연인간의 따뜻한 정을 표현하는 경우에 ‘정답다.’라고 표현하여 의미 변화가 없지만 ‘학생답다’는 예전에는 복장이 단정하여 ‘학생답다’고 하든지, 선행을 하여 ‘학생답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도덕을 잘 지키는 학생이라서 ‘학생답다’라고 표현 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요즘은‘학생답다’의 의미가 퇴색하여 ‘학생답다’는 의미가 ‘답답하다’는 의미로 변질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오히려 청순한 이미지 즉 춤도 잘 추고 발랄하여 소위 톡톡 튀는 학생을 ‘학생답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본다.

2) ‘정답다’는 자음으로 끝나는 어근과 결합했지만,  ‘학생답다’는 그러한 제약이 없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3) ‘정답다’는 명사나 어근과 결합하고 ‘학생답다’는 명사에만 결합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4) ‘정답다’는 ‘아름다운’, ‘꽃다운’처럼 관형의 수식을 받을 수 없지만  ‘학생답다’는 ‘의리의’, ‘사나이다운’처럼 관형어의 수식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 이유로 파생어의 기능 보다 굴절적인 기능을 하는 굴절형 접미사로 보이기도 한다.

 

구글을 검색하여 보니 ~ 답다는 일부 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붙어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요사를 만드는 접미사로  꽃답다/ 남자답다/ 여자답다/ 사람답다/ 정답다/너답다/ 우리 엄마답다처럼 쓰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무조건 답다를 접미사로 붙이는 경우에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짐승답다는  조금 어색하다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서적을 찾아보니 정답다와 학생답다는 문법적으로 같은 접미사가 결합한 것으로 본다고 되어 있다.

 

그동안 배운 내용을 회상하여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면,

(어근)+ 답다와  학생(어근)+ 답다에서 답다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로 이루어진 파생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답다는 일부 명사 또는 명사구 뒤에 붙어 그 어근의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비슷한 예를 들면 꽃답다/친구답다/선생답다/우리나라 대통령답다 등으로 쓰인다.

본인은 얼마 전 일본을 방문 하였을 때, 한 학생이 등교를 하면서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참 학생답다.”라고 혼자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시 형태소를 세세하게 구분해 보면 정답다. 에서 ~ 답은 접사이고, ~다는 종결어미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답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하나의 접사로 등재되어 있다. 학생답다. 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정답다: 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생답다: 학생의 특징을 보인다.

 

접사의 예를 더 살펴보면 질(손질, 빗질), 아지(송아지, 망아지), `(울보,털보) 등과 같이 체언 어기 뒤에 붙어 체언 어간을 형성하는 것과 정답다, 학생답다 와 같이 ~ (꽃답다신사답다), ~스럽(복스럽다, 다정스럽다),~ (해롭다.슬기롭다), 등과 같이 체언 어기 뒤에 붙어 용언 어간을 형성하는 것이 있다. 정답다와 학생답다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이와 같은 접미사는 한자의 경우 매우 생산적이어서 ~(), (), () 등 수많은  파생어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첩어인 어기에 붙어서 부사를 만드는 부사형접미사도 있다. 예를 들면, ~(곳곳이, 다달이) 등이 있다.

 

용언어근에 덧붙어서 용언 어간을 형성하는 접미사로 ~(놓치다, 받치다) ~뜨리(빠뜨리다, 깨뜨리다) 등과 같이 강세의 뜻을 덧붙이는 것과 ~(먹이다, 놓이다), ~(식히다,입히다) ~(알리다, 울리다), ~~(벗기다, 신기다), ~(갖추다), ~(돋구다, 달구다) 등과 같이 주동사를 사동사로 바꾸는 것과 피동사로 바꾸는 이,,,기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용언 어기에 덧붙어서 체언어간을 만드는 접미사 ~()(, ), ~(높이, 먹이) ~(쓰기, 크기), ~(지우개, 덮개), ~( 마중-마중)과 부사를 형성하는 접미사 ~(깊이, 넓이), ~(넘우-너무, 맞우-마주) 등이 있다.

 

또 동사를 전선시키는 접미사는 ~(그립다, 보고싶다), ~(믿보다-미쁘다, 낮보다-나쁘다), ~(믿업다- 미덥다) 등이 있다.

 

‘정답다’, ‘학생답다’.의 ‘답’은 제한적으로 사용 되지만 한자는 ‘~()’을 예로 들어보면, 정치적이다, 경제적이다, 사회적이다, 문화적이다, 의도적이다. 와 같이 한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생산적인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한국어의 단어는 조어법에 따라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누어진다.

단일어는 형태소 하나로 이루어진 어휘를 가리키는 것이고 복합어는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누어지는데 두 개 이상의 어근 형태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어휘로 형성되는 것을 합성어라고 하고, ‘정답다’, ‘학생답다’와 같이 어근과 접사가 결합하여 새로운 단어로 형성되는 것을 파생어라고 한다.

 

여기서 파생어는 또 다시  어근 앞에 붙는 접두사 파생어와 접미사가 어근 뒤에 붙는 파생어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접두사 파생어의 경우는 접사가 뒤에 오는 어근의 뜻을 제한하거나 의미를 첨가할 뿐 품사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접미사 파생의 경우에는 접두사 파생어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어근의 품사를 바꾸어 여러 가지 품사를 만들어 낸다.

바로 ‘정답다’ 와 ‘학생답다’가 형용사로 만드는 ‘답’이 붙는 경우라 생각된다.

 

그리고 ‘학생답다’는 ‘좋지않다’와 같이 짧은 부정문을 이루지 못하고 긴 부정문만 이룰 수 있다는 제약이 있다고도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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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를 사정하는 국립국어원에 대하여 본인은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표준어로 수용된 어휘들을 살펴보면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이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전면적인 부정은 곤란하지만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하고 표준어 제정의 일차적인 목적은 원활한 의사소통에 있다고 배웠습니다만, 합리성과 전통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선정하고 있어 개인의 소견으로는 분명하게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 2014년 표준어 추가 사정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생활에서는 많이 사용하지만도 그동안 비표준어로 분류되어 있던 13개 어휘가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에 의해 2014.12.15.일 표준어 추가사정안을 발표하여 표준국어대사전에 반영했습니다. 살펴 보니 2011년에도 ‘짜장면’, ‘맨날’, ‘눈꼬리’ 등 39항목을 표준어로 추가했고 2015년에도 마실(마을), 이쁘다(예쁘다)  16개 항목을 추가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매년 표준어를 양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2014년 표준어 추가 사정안을 보니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1. 현재 표준어와는 뜻이나 어감이 달라 별도의 표준어로 인정한 경우입니다.

) 현재표준어 개개다, 추가표준어 개기다

개기다는 누구의 명령이나 또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버티거나 반항하는 경우에 사용합니다.

개개다는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다. 라는 뜻입니다. 속된 표현입니다

 

) 현재표준어 꾀다, 추가표준어 꼬시다.

꾀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예를 들면, ‘여자를 꼬시다.’또는‘아이를 꼬시다’등으로 사용됩니다. 꼬다는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으로 남을 속이거나 부추겨서 자신의 생각 되로 끌다. 의 뜻입니다. 속된 표현입니다.

 

) 현재표준어 장난감, 추가표준어 놀잇감

놀잇감은 놀이 혹은 아동교육 현장 등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나 재료를 의미하고, 장난감은 주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컫는 뜻입니다.

 

) 현재표준어 딴죽, 추가표준어 딴지

딴지는 보통 걸다, 놓다와 함께 쓰여 어떤 일이 순순히 진행 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어기대는 행위를 의미 합니다. 딴죽은 이미 동의하거나 약속한 일에 대하여 딴전을 피우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 현재표준어 사그라지다, 추가표준어 사그라들다

‘사그라들다.’는 삭아서 없어져 가다의 뜻이고 사그라지다는 삭아서 없어지다의 의미입니다.

) 현재표준어 섬뜩, 추가표준어 섬찟

 

섬찟은 갑자기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느낌이 드는 모양을 의미하고, 섬뜩은 갑자기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한 생각이 드는 모양을 뜻합니다.

 

) 현재표준어 속병, 추가표준어 속앓이

속앓이는 속이 아픈 병 또는 속에 병이 생겨 아파하는 일, 또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하고속으로 걱정하거나 괴로워하는 일을 의미하고 속병은  몸속의 병을 통털어 일컫는 말이거나위장병을 통상적으로 이르는 뜻이며 또는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여 생긴 마음의 심한 아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현재표준어 허접스럽다 추가표준어 허잡하다

허잡하다는 허름하고 잡스럽다는 의미이고, 허접스럽다는 허름하고 잡스러운 느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2.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이 다 같이 널리 쓰이는 경우에는  둘 다 복수표준어로 인정한다는 내용입니다.

) 현재표준어 삐치다, 추가표준어 삐지다.

노여움에 마음이 토라지다의 뜻입니다.

 

) 현재표준어 눈두덩, 추가표준어 눈두덩이

눈언저리의 두두룩한 곳을 이르는 의미입니다.

 

) 현재표준어 구안괘사, 추가표준어 구안와사

입과 눈이 삐뚜어 지는 병이며 이 병은 안면에 분포된 우농신경이 마비되어 온다고 하여 안면신경마비증 또는 와사풍이라고도 합니다.

 

) 현재표준어 작장초 추가표준어 초장초

괭이밥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서 봄에 나물로도 먹는 식물입니다. 작창초의 작자는 잔 돌릴작과 신맛초의 두 경우로 쓰임.

 

) 현재표준어 굽실, 추가표준어 굽신

고개나 허리를 숙여 깊숙이 구부리는 모양을 뜻합니다. 또는 남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비굴하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복수 표준어를 인정 했지만 본인의 소견으로는 타당성이 결여 되었다고 생각하며 표준어 사정을 남발하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럽습니다.

 

)항의 현재표준어 ‘장난감’으로도 충분한데 ‘놀잇감’을 추가표준어로 하는 것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정하였는지?  그리고  역시 다항의 현재표준어 ‘구안괘사’의 표준어가 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안와사’를 추가표준어를 또 정하는 것은 양비론과 같은 위험한 발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표준어 사정원칙 1)에서 어원에서 멀어진 형태로 굳어져서 널리 쓰이는 것은 그것을 표준어로 삼는다. 라고 되어 있는데, 삭월세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글세는 표준어를 표준어로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솔직히 곤란합니다. 돐을 돌로 표준어로 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본인은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비속어로 알았던 어휘 (조지다: 호되게 때리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로 표준어가 맞음, 꼽사리: 남의 판에 거저 끼어드는 일))가 표준어임을 알고 놀랐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사투리로만 알았던 거시기, 아따, 시방, 식겁하다, 열없다, 낫낫하다 등이 표준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한글에 복수표준어는 오히려 줄여 나가야 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타당성 결여로 인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복수표준어는 분명히 정비 되어야 합니다.

한글 표준어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표준어 추가 발표에 보다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노인빈곤문제의 해결방안

*목차

. 서론
. 본론
  1) 현실태
  가. 빈곤 개념
  나. 빈곤의 원인
  다. 빈곤 사례

  2) 문제점

  3) 해결방안

  4) 기대효과

. 결론

. 과제를 통해 느낀 점

. 참고문헌  









. 서론

  오늘날 노인의 빈곤문제는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많은 국가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다가오는 2030년에 한국에서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비율로 노인인구의 증가에 따라 파생되는 빈곤의 문제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 시킴으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자리 잡았다.
빈곤문제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과거에는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파악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인식하는 변화를 가져왔고, 빈부의 격차는 사회통합을 해치며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 본다.


. 본론

현실적으로 빈곤은 한 개인이나 가족이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시대에서의 경제적 위치를 중심으로 고려할 수 있다. 경제적 빈곤은 개인이나 가족이 일정 소득 이하이면 빈민이라 한다.
최저생계비란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을 의미하는데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최저생계비는  1) 육체적 생존을 위한 기본적 최저생계비, 2) 사회적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 생존적 최저생계비, 3)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이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하는 노동 재생산적 최저생계비, 4) 문화적 최저생계비로 나눌 수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벤지민 S, S, 라운트리는 빈곤선이라는 것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빈곤으로부터 개인을 벗어나게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재화량을 산출한 것을 말한다.
의식주 등 기본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본다.
상대적 빈곤은 특정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수준과 관련이 있어 상대적 박탈과 불평등의 개념을 중시한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은 제삼자의 3 입장에서 객관적인 수준이 결정되는 반면, 주관적 빈곤은 빈곤한 사람들이 빈곤으로 느끼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빈곤은 개인의 안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과 주관적 기준이 모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빈곤의 발생원인은 시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낙인 주의 관점에서 본 학자들은 개인의 동기 부족, 낮은 열망 수준, 무절제, 게으름,의타심, 과도한 출산, 부적응 등을 원인으로 보며, 기능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학자들은 질병, 노력, 저 교육 수준 등을 원인으로 본다.
또 갈등주의 관점에서 본 학자들은 재산, 권위, 권력, 지식, 자원, 기회주의에 빈곤의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들 이론은 빈곤의 발생 원인을 개인적 결함과 사회적 책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노인의 빈곤문제에 대한 원인을 진단해 보면, 우선 조기 퇴출이다. 수명의 연장으로 인하여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반 강제적으로 퇴출되어 실업의 상태에 빠지므로 빈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다음은 역할상실이다.
생산기술이 기계화됨으로 인하여 사람의 역할이 기계로 대체되어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이 감소되었다.
노인인구는 많아지고 노동력은 제한됨으로 경쟁이 생기고 심신이 취약한 노인들이 젊은 세대에 밀려 빈곤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퇴직으로 인하여 수입이 절감되어 노인들은 빈곤으로 빠지게 되고, 물질적 어려움과 더불어 심리적 빈곤에 함몰된다..
대다수의 노인들은 사회 심리적 갈등으로 인한 인간소외문제를 겪고 있다. 특히 세대 간 교육 수준 및 가치관의 차이 가족 내 노인의 지위 저하 그리고 핵가족화로 인하여 가족과 사회로부터 심리적 소외감과 고독감을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인학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부모와의 동거, 별거 문제 별거 문제, 부모봉양 문제 등에 대한 심각한 갈등이 표출된다. 이는 노인의 빈곤문제와 직결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노인의 빈곤실태를 요약해 보면, 의탁할 곳 없이 노쇠한 건강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폐지를 수집하여 팔아 생을 연명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증가일로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농촌인구의 대다수가 노령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고 있으며 쌀값 폭락으로 빈곤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독거노인들이 증가하고 건강을 돌 볼 틈이 없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가 다반사로 나타난다.
또한 가족 간의 불화로 격리된 삶을 영위하고,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행각으로 재산을 잃는 사례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노인이 조기에 재산을 자식에게 증여하였으나 막상 자식이 부모 봉양을 기피하여 억울하게 빈곤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이외로 많았다.

이와 같이 자타의 원인으로 불가피하게 빈곤한 삶을 지탱하는 노인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은 현대 시민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부 정책도 물론 중요하지만 노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접근하는 사회적 시각의 변화와 노인들의 독립정신 그리고 정부의 효율적인 복지정책이 합치될 때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비근한 예를 들면 고용에 있어서 연령제한 철폐의 법제화는 노인들에게 상당한 기대감으로 다가왔지만 막상 법이 형식적으로 집행되어 사문화되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 결론

결론적으로 노인의 빈곤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로 정부에서는 소극적인 정책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노인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농촌과 도시지역을 세분하여 노인의 열악한 삶의 빈곤 실태를 점검 파악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시에는 재산을 환원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개선이 필요하고, 사회 제 분야의 교육에서 노인에 대한 윤리적 접근을 가미하여 노인이 빈곤한 삶을 살지 않도록 적극 개입하여야 한다.
현재의 노인세대는 우리 한국의 산업화를 앞당긴 주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한한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노인 스스로도 의타심을 버리고 스스로 독립정신을 길러 빈곤으로부터 깨끗하게 탈출하여 멋있는 노후 생활을 보내야 한다.

노인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책임도 있지만 반대로 웰빙과 웰 DYING의 권리가 있다.

송기(松肌)의 추억

 

2010 08월 어느 날,

난 새마을리더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탄자니아의 팡가웨 마을에 서 있었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니 맨발로 학교에 다녔고, 한 아이는 마른 소나무가지처럼 말라 애처로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그 곳에는 쌀도 없었고, 보리도 전무하고 국수도 없었으며 송피(松皮)마저 없었다. 따라서 영양실조에 걸리고 척박한 환경에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열의 통증에 울부짖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풀과 진흙으로 지은 움막집에서 하루 또 하루 생명을 연명하며 가난에 찌들어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상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50년 전으로 날아가 끔찍했던 한국의 생활을 회상하게 한다.

 

1960, 내 나이 7세였다.

경북 경주시 외곽 북변에 위치한 안강읍에서도 한 참 걸리는 고즈넉한 산골마을인 가마실에 살았다.

 

신발은 짚신을 신고 있었고, 복장은 헤집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몸은 영양실조에 걸려 버들가지처럼 흔들 거렸다.

백구 친 빡빡머리에는 부스럼헌데가 나 있는 초라한 몰골 그 자체였다.

 

배가 고프면 낫을 들고 산에 올라가 물찬 소나무 가지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 물을 빨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50년 전 아련한 추억으로 거울같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건만 요즘 아이들은 천지를 모른다. 아니 거짓말을 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훌륭한 영도자를 만나 거짓말처럼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이 땅에서 가난을 물리친 지도자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나는 자신 있게 단언한다. 나는 그분을 충심으로 존경한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가난을 물리친 지도자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훌륭한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혹자는 지나친 비약이라 할지 모르나 전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추론이다.

중학교는 고사하고 국졸도 어려웠을 것이다. 좋은 집, 좋은 차 굴리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꿈만 같은 현실이 된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누가 뭐래도 그분의 공적은 감출 수 없고 부정(否定)하려고 애를 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여기서부터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100% 팩트로 피력하고자 한다.

1959년 봄 내 나이 6세 때, 우리 집은 매우 희망이 밝았다.

형산강 하천부지를 일구어 벼를 심었다. 아주 농사가 잘 되었다. 알알이 영근 벼 이삭을 보며 수확하여 알콩달콩 행복한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911일 우리지방에는 사라호 태풍이 몰아쳤다. 거센 바람을 동반한 폭우는 집동만한 나무도 뿌리를 뽑아버리고 홍수가 범람하여 수확진전의 벼를 한 알도 남김없이 깨끗이 쓸어 가 버렸다. 난 아직도 강바닥에 앉아 망연자실하여 흐느끼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쌀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를 목격하며 살았기에

가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1961년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이었다.

난 매일 약4km 거리에 위치한 학교를 오가며 가난에 허덕이는 무수한 광경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주린 배를 움켜지고 바가지를 들고 조금 잘 사는 집에 들어가 “밥좀 주이소!”하는 가는 목소리의 소녀를 목격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학교에 출석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선 가족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정작 나는 더 가난하여 몇몇 날을 굶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렇게 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중식시간에는 동무들의 밥을 얻어먹기 보다는 수돗가에 가서 물을 들이켜 배를 채우는 가식이 나를 옴짝 달싹 못하게 했다.

 

길가의 논에 도열병 같은 병균이 돌아 헛열매가 많이 보이던 해의 이듬해 보릿고개는 더 혹독했다. 깊은 산에는 칡뿌리를 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름 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감꽃이 떨어지면 감꽃을 먹고, 참꽃이 피면 참꽃을 먹었다.

 

그해 가을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할 것처럼 낮게 맴돌며 빙빙 돌더니 하늘에서 종이를 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보갓산 산마루에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재빨리 형산강 지류인 칠평천 조약돌 위로 달음박질 쳤다.

 

하늘에서는 사각의 종이(A-5 용지)가 뱀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을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철없이 아등바등 거렸다. 한 묶음을 주워 아주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종이에는“재건 건설”이라는 표제 문구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 박정희라는 영웅이 나타났다.”라고 말씀하셨다.

5.16 혁명으로 이 땅에 부정부패(正腐敗)를 일소하고 나라를 부강 시킬 것이라고 예단하셨다.

그 당시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왜냐하면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우유가 어린이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강냉이 죽도 끓어서 우리들에게 배분해 주었기 때문에 배가 든든했다. 원조를 제공해준 그 분들에게 나는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난 아직도 그 고마움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잊을 수가 없다.

 

비록 교실이 부족하여 그늘나무 아래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공부했지만 늘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또한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 오후반으로 이등분하여 수업을 받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형산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서 비가 많이 내리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외사촌 형과 개울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송어, 메기, 미꾸라지 그리고 엄청 재수가 좋은 날에는 뱀장어도 잡는 행운도 따랐다.

그러다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호롱불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었으니까.

그 때는 호롱불이 밝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전기가 들어오고는 신천지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인 1962년부터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하였다. 당시의 국민소득 수준이 91달러였다. 얼마나 가난한 국가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나는 “농공병진정책”이라는 현수막이 읍사무소 담장에 걸린 것도 그 때 보았다.

농업으로 살아가는 원시적 생활양식이었기에 흉년이 들거나 홍수가 지는 년도에는 더 어렵게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나는 사실상 보릿고개가 그렇게 매서운지를 몰랐다. 초봄에는 장사꾼이 들어와 어머니와 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곤 했다.

그 돈으로 양식을 팔아 밥을 먹을 때는 어린 나이지만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와 누이에게 미안했다.

그 때 라디오 방송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 또렷하게 흘러 나왔다. 가난은 우리 세대에 끝내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감했다.

나는 열심히 배우고 근면하게 생활하여 가난을 물리치는 선봉에 서리라 굳게 다짐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아주 어렵게 마쳤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는 사실을 잘 아는 나는 포기할 마음을 수차례 가졌다. 하지만 부모님과 누이의 교육열에 힘입어 안강중학교에 진학했다.

 

우리 마을에서 동급생이 4명 있었는데, 가장 가난했던 나 혼자만 진학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생활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나무도 하고 보리 짚을 이용한 수공작업도 열심히 했다. 또 그 당시에 우리 집 먹는 물(食水)은 어머니가 1km 정도 떨어진 샘물을 바가지로 떠서 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산을 넘어 집으로 운반해 오셨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무지개로 나르기도 했다. 그리고 토끼와 같은 가축도 키웠다. 그리고 또 다른 수입원인 산토끼와 꿩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밀엽금지와 같은 단속이 없었다.

누구나 사이나라 불리는 청산가리를 구입해서 콩을 파서 약을 넣고 초로 봉하여 꿩이 많이 앉는 지역에 줄을 지어 놓거나 찔레나무 열매를 갈라 약을 넣고 초로 봉하여 보리밭 언저리에 놓아두었다.

달밤에 토끼가 내려와 이를 먹으면 즉사하는 것이다. 꿩은 이를 먹고 그 자리에 즉사하는 경우도 있고 멀리 날아가서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면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으로 향했다.

어떤 날에는 다섯 마리 또 어떤 날에는 열 마리 이상도 수거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통말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다. 초저녁에 통말을 놓고 새벽 03:00분경 공동묘지를 지나 산 하나를 넘어 통말을 수거하러 다녔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의 한계였다.

1968.12.05.일에는 역사적인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마력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헌장의 취지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진지하게만 다가왔다.

 

 

 

 

 

 

 

이런 세월도 빨리 지나가고 나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도 전기불이 들어왔다. 새마을 구판장도 생기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넘쳐났다.

 

동네마다 일정량의 새마을 시멘트가 균등하게 배부되고 지붕개량사업, 부엌 환경개선사업, 화장실 개선사업 등이 경쟁적으로 실시 집행되었다.

나는 마을 부역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가했다. 한집에 한사람은 무조건 의무적으로 참가하여 마을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역이다.

우선 28번 국도가 비포장 도로였기에 비가 오면 유실되고 파이어 보수작업이 필요했다. 우리 마을의 담당구간은 하곡저수지 인근으로 기억 된다. 자갈을 깔고 다지는 일을 했다. 새참 시간에는 내가 가장 어린 나이 이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막걸리를 부어 드리는 일을 전담했다. 술 치는 법을 그 때 배웠다.

다음은 마을의 물길을 여는 부역이다. 한해(旱害)가 되면 강바닥을 파서 물이 농토를 들어가도록 물길을 내는 일을 협동 삽 등을 이용하여 하염없이 일을 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아래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여 마을길을 넓히고 다리도 건설하고 획기적인 건설작업이 날마다 집행되었다.

가장 기억나는 사업을 꼽으라면 나는 녹화사업을 꼽는다. 그 때 산은 헐벗은 산이 많았다. 이를 푸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 하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는데, 나도 참여 했다.

일렬로 정리된 산의 나무가 보기가 좋다고 하여 못줄을 양쪽에서 당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나무를 심었다.

밤나무와 같은 유실수를 많이 심었으며 하루에 일정액의 돈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결과 지금은 숲도 푸르고 그 과일을 풍족하게 따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유익한 사업이었던가?

그리고 자급자족이라는 큰 목적아래 통일벼가 연구되고 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가난이라는 것이 물안개처럼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쥐잡기 운동을 할 때는 쥐꼬리를 잡아 학교에 가서 검사를 하기도 했다.

혼식분식 장려운동을 할 때는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어 검사를 밭고 식사를 했다. 마을마다 꽃길 가꾸기 운동도 했다. 길 양 옆으로 코스모스를 심어 하늘거리는 꽃길을 걸어가던 그날이 그립다. 회충퇴치운동 등 가지가지 운동으로 국민들을 계도했다.

 

우리 마을에는 50호가 옹기종기 살았는데, 두 집을 제외하곤 전부 초가집이었다.

해마다 새로운 짚으로 단장을 하는데 위험한 일이라 추락하여 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스레트 지붕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역시 협동사업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우리 마을엔 매탄가스를 이용하기 위하여 마당 언저리에 콘크리트탱크를 설치하여 관로를 연결하는 작업도 했다. 마을에서 단합하여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니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새마을 부녀회에서는 새마을 구판장 사업도 발전적으로 개선하여 시행하였다.

 

그 때는 살기가 바빠서 화장실의 청결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로 바뀌고 다시 양변기로 바뀐 다음 요즘은 비데가 설치된 최고의 화장실로 변화되어 이제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거지나라에서 국민소득 30,000만 불에 육박하는 부유한 나라로 바뀌어 6,25참전 외국인 용사들이 다시 한국을 찾아보곤 감동한다고 한다.

우리는 지원받는 나라에서 지원하는 나라로 바뀌어 세계 도처에 해외봉사단 요원들이 한국국제협력단을 통해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우유와 강냉이 죽을 얻어먹고 자란 그 빚을 갚으러 아프리카로 갔다.

그 나라 고급관리가 내게 물었다. “대한민국은 이디오피아로부터도 지원 받은 가난한 나라가 분명한데 어찌하여 단시간에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가?”라고 하여 나는 서슴없이 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을 알려 주었다.

 

그는 감탄을 연발했고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것을 부러워했다.

나는 탄자니아에서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배운 그대로 백만 평의 국유지가 있다하여 그 곳을 답사하여 그 땅에 많은 량의 유실수를 그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심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많은 과일이 열리고 이를 팔아 마을 소득증대를 한다고 소식을 전하여 오니 무척 흐뭇하다. 그리고 이곳은 물이 귀해 옛날의 우리나라 어머니들처럼 머리에 옹기를 이고 원거리를 물을 운반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숙란간호사 선생님과 힘을 합하여 급수원을 개발하고 공병장교로 근무하던 때 익힌 기술로 물탱크와 급수관로를 연결하여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졸졸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주고 귀국했다.

지금도 그 물로 식수를 하고도 남아 농수로 활용한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내가 체험한 바로는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옛날 60년대 우리나라 농촌의 인심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기회가 온다면 다시 그들을 돕고 싶다. 어린 시절. 우리 또래가 자랄 때 가난에 허덕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갈망했듯이 그들도 지금 누군가의 도움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리라.

 

한편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사회로의 전환으로 물질문명은 풍족해 졌지만 정신적 측면은 따라오지 못했다고 나는 감히 단언 한다.

오히려 후퇴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공영의 원칙도 잊은 체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사회가 된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해외봉사활동을 종료하고 귀국하여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일했다.

나는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참 많았다.

 

세대차가 난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란 박정희대통령의 어록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현실이다.

어쩌면 이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투철한 국가관은 여러 대통령을 거치면서 또는 전교조 교사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따라 많은 부분 희석되어 왔다. 우리 기성세대에도 일말의 책임은 있을 것이 명백하다.

 

나는 2017 12월 격분하였다.

표창원이라는 국회의원이 감히 박근혜대통령의 나체사진을 국회에 전시한 사건이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건천궁에서 시해 당한 후 우리 국민들이 분해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하물며 살아계시는 대통령을 욕보인 ‘더러운 잠 그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패륜행위(悖倫行爲)로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표창원에게 살의(殺意)를 느꼈다.

 

그 길로 바로 주섬주섬 옷가지를 가방에 넣어 서울행 열차에 올라탔다.

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곧장 시청 앞 광장 켈로 부대에 입소하여 천막에서 6개월을 지냈다.

나는 그 곳에서 시련의 시간을 보내며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인내의 시간은 보냈다.

서울의 바람은 매서웠다.

처음에는 눈이 내린 땅에서 잠자는 바닥에서 질퍽질퍽 물이 올라왔다. 새우잠을 자고나니 온 몸이 부슬부슬하다. 새벽에 지하철운행시간을 기다렸다가 지하철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마치고 다시 근무에 돌입했다. 아침밥은 라면 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우리는 서울시청 용역들과 자주 충돌했다. 오늘은 스치로플과 부직포가 들어 왔는데 그것도 반입을 불허했다. 탄기국 민중홍 사무총장이 차에 올라가 그들과 대면했다. 그가 던지는 부직포를 날렵하게 받아서 본부로 이동했다. 용역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오늘은 밥값을 제대로 했구만...”라고 자화자찬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텐트 안이 추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소변이 마려울 때 고통스러웠다. 지하철 화장실도 밤 01시에는 문을 잠그고 서울시청 화장실도 자정 넘어 야속하게 문을 잠근다.

염치불구하고 프라자호텔로 들어가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나는 박정희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박근혜대통령도 충심으로 존경한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도 박정희대통령은 치밀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 국민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 분이시다.

그리고 박근혜대통령은 두 분의 부모님을 불의의 총탄에 잃고도 흔들림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해 오신 진정한 국모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대통령 탄액은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 일축한다.

기획된 모략이고 중상이며 음해일 뿐이다.

나는 시청 앞 천막 속에서 거주하며 태극기부대가 위험한 곳에는 다 출장을 다녔다. 그리고 촛불세력의 광기를 목격했다.  광화문에서는 축구공에 박근혜대통령의 얼굴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차도록 하는 만행을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또 대통령을 겁박하는 단두대를 설치하고 대통령 마네킹형상을 만들어 동아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고 심지어는 국회 앞에 버젓이 팽개쳐 두기도 했다. 나는 이때부터 국회의원을 불신했다.

김진태의원을 제외하고는 단 한사람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태극기 동지들은 국개의원이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보신각에서는 모의 창살을 만들어 대통령님 형상을 가두어 끌고 다니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도 목격했다.

나는 이석기 석방 등을 외치는 그들이 한없이 미웠다.

2017 310일 파면권이 없는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던 날, 나는 소위 헌법재판소 공격의 선봉에 서 있었다.

 

스피커가 떨어져 사망한 애국열사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그날 이상하게도 미리 결과정보를 안 경찰은 전북경찰을 서울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우리가 겹겹이 친 경찰의 방어벽을 뚫기는 사실상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4명의 열사들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날은 우리 애국동지들의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직 우리 박근혜대통령을 위하여 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뿐이었다.

내 바로 앞의 켈로 요원은 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앞니 4개를 잃었다. 나는 왼쪽방향으로 공격했다. 앞사람이 넘어 지면서 연쇄적으로 넘어졌다. 나도 무수한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ᄁᆞᆯ렸다.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죽는 구나!” 라는 가는 소리와 함께 죽음의 공포감이 나를 엄습했다.

마침 배낭을 메고 사람더미에 깔렸기에 배낭이 다소의 완충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인대확장으로 대구의 연합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날은 아픈 줄도 몰랐다. 다시 일어나 헌재 방향으로 전진을 감행했다.

버스를 용감하게 타고 넘는 백하순 동지도 보였고,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은 각개전투를 낮은 포복으로 버스 아래를 포복하여 통과하는 박창숙 동지의 용맹한 모습도 목격 되었다.

그들 주부들은 모두 억울한 박근혜대통령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뿐이었다.

애국의 대열에서 내가 목격한 바로는 70대가 가장 용감했다.

버스위에서 항거하다가 건장한 청년 4명이 올라가 집어 던져진 사람도 70대요, 스피커에 맞아 죽은 사람도 70대다. 그들 열사들은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기를 반복하여 안국역 2번 출구 황금정 앞까지 진출했다.

그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역시 70대로 보이는 애국자가 황금정 지붕 위 바로 내 머리 위에서 긴 각목을 들고 경찰에 대항했다.

하지만 의경 5명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올라가 애국자를 제압했다.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소리까지는 들었다. 지붕아래에서 아줌마들은 “경찰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는 아직도 그 분의 안위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우리는 그날 너무나 분개하여 헌법재판소로 나아갔지만 미리 올라온 전북경찰의 봉쇄작전에 밀려 기껏 황금정 앞에 집결하여 철수를 강요받았다.

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천막 속에 머물며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다.

난 대통령 삼성동사저에도 수차례 가서 맞은 편 옥상에서 카메라를 들고하루 종일 사생활을 침해하는 기자를 향하여 분노의 돌멩이를 과감하게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서청대(서울구치소)앞에서 연설도 하고 편지도 보내고 울부짖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양재동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내곡동 사저에 가 보기도 했다.

 

지금 나라가 걱정이다.

비봉출판사에서 발간한 이주성씨의 『보랏빛 호수』를 읽고 5.18은 분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하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지금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국민들이 대오 각성하여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지켜온 대한민국인데 결단코 좌익세력에게 넘길 수는 없다.

나의 일련의 행동은 영웅심도 공명심도 아니다.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대통령 덕분에 일평생 잘 살아왔다. 그 큰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의 실상이다.

특히 어린 시절 가난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체험한 사람들 중의 일원으로 가난에서 구출해 주신 우리 박정희 대통령의 공덕은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이 한없이 크다.

그렇다.

대대로 이어 온 무서운 가난은 박정희 대통령이 종식시킨 것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고 위대한 업적이다. ()

 

 

                                     손승호.

 

 

2017 08.24.19:00시 가벼운 마음으로 오오극장에 들어섰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는 개소 10주년을 맞아 인권영화 시네마수다를 3일간 개최한다.

 

나는 그 첫날 첫 영화를 3번 줄 통로 쪽에 앉아 관람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 된 오늘의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고 구수한 연기를 잘하는 오달수가 파출소장으로 출연한 이주노동자의 애환을 주제로 각색한 옴니버스 영화였다.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자전거 여행/잠수왕 무하마드”의 단편 3편을 1시간가량 관람하고 이야기 손님으로 경산이주노동자센터 김현주 소장의 진행으로 관련된 현안문제를 설명하고 질문과 응답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 경북 군위군의 한 축산농가에서 일하다가 유독가스로 질식 사망한 네팔 청년의 유가족인 친형 발 바하두르 구룽(29)씨와 대구성서공단에서 일한 통역의 또 다른 네팔인이 사실적 증언을 하였다. 감명 깊게 경청했다.

안타까운 사연을 지척에서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컥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영화의 내용은 1편에서 네팔인 찬드라씨는 ‘선미야’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로 라면가게 앞에서 우연히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돈이 달려 빠져나와 흘러 버리고는 라면을 먹은 후에 무전취식으로 몰리며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무려 6 4개월을 인권이 결여된 생활을 하는 기막힌 이야기,  2편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급히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3편은‘잠수왕 무하마드’가 코리안 드림으로 우리나라에 왔으나 막상 페인트 공장에 취업되어 안전장구라고는 마스크 한 개 뿐, 열악한 환경에서도 미등록이주노동자로 쫓기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의 영화관람과 후속시간은 참으로 유의미한 시간 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네팔인 두 사람의 실체적 증언은 그 어떤 영화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겼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네팔의 한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마쳤지만 네팔에는 일할 공장이 없어 오직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으나 그에게는 척박한 직장환경과 직면한다.

하지만 자기선택권이 거의 전무한 현실여건에 순응하며 경북 군위 우보면의 시골의 농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농장주의 안전의식 결여로 황하수소로 추정되는 유독가스에 질식하여 사망에 이르고 그의 순수한 꿈도 물거품이 됐다.

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경청하며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의 한사람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사죄하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우리나라도 수십 년 전에는 가난했다. 끼니 걱정도 했고 공장이 없어 선진국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지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선진국의 반열에 든다하여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었다는 말인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인 이주노동자들을 마치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한다는 이주노동자의 절규에 가까운 증언에 죄인이 된 것처럼 가슴이 따갑다.

“너는 외국인이야!” “피부 색깔이 달라”라고 말하며 이유 없이 혐오하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냉혹하게 반성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반대로 외국에 나가면 똑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엄연한 논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즉각적이고 실제적으로 이주노동자 인권개선 대책을 종합적으로 수립하고 바로 집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오극장을 나서며 혼자말로 중얼 거렸다.

 

“이주노동자는 결코 노예가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바로 우리의 인권이다.

(효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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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개소 1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2017년 인권상담 네트워크 제2차 현안발표회 HIV감염인의 인권 “에이즈, 터놓고 말해요”의 행사가 091419:00부터 인권교육센타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 되고 있었다.

평소 뒷자리를 선호하던 나는 그날은 앞자리에 앉아 비교적 생생하게 교육내용을 전달 받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김지영 강사님은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관심결핍증으로도 불리는 에이즈에 관하여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셔서 귀에 속속 들어왔다.

국내의 한 설문조사에서 “~ 과는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97%라는 것은 우리사회가 에이즈 감염환자를 얼마나 혐오하고 소외시키며 부정적으로 보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흔히 에이즈는 나와는 무관하며 멀리할 대상으로 생각하며 불치병, 무서운 병, 도덕적 지탄, 등의 어휘를 연상하면서 동성애자가 걸리는 천형으로 배척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나라에 에이즈 누적 감염인 수는 15,000여명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발견하지 못한 감염인 수가 최소 3배 많게는 10배로 추정한다고 하니 실로 심각한 현실이다.

 

더군다나 관련 신약의 개발보급으로 에이즈 환자 신규발생 수나 사망자 수가 감소하는 것이 세계적인 통계치 임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정반대로 국내 감염인수는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뿐만 아니라 연령별 발생현황을 살펴보니 20대가 가장 많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재고할 문제라 생각한다.

 

차제에 에이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키고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에이즈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치명적이지 않다. 약만 잘 복용하여도 증상의 악화를 차단할 수가 있다. 또한 선제적 예방조치를 지속적으로 한다면 에이즈 감염인 수의 감소는 시간문제라는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된다.

 

에이즈의 감염원은 혈액, 정액, 질 분비액, 모유의 순이다. 이러한 감염원은 성 접촉에 기인한 발생이 99.3%라고 한다. 우리는 다시금 성문화 전반을 통찰하고 예방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원인이든지 간에 일단 감염된 에이즈감염 인에 대한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우리는 성한 사람도, 어떤 병에 걸린 사람도 모두가 소중한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오히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병약한 자국민을 보호할 사회적 안전망의 확실한 구축이 절실하고 그것이 바로 국가의 책무인 것이다.

 

 

이어서 HIV/AIDS 감염인 탄체 러브포원 박광서 강사님께서 감염인의 인권침해 사례를 실증적으로 진지하게 알려 주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교육생들의 시선은 빛이 났다. 에이즈에 관하여 너무나도 무지했던 사항들을 오늘의 열강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었다는 일종의 희열(喜悅)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질의응답 시간이 연결 되었다.

나는 아프리카 봉사활동 중 정말로 궁금했던 사항, 즉 가위나 면도기 등으로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상세한 답변에 고무되어 많은 질문과 응답이 이어졌다.

 

교육은 21시까지 2시간의 예정시간을 훌쩍 넘겼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45분이 초과된 2145분에야 마무리 되었다.

강사의 일방적 교육이 아닌 강사와 교육생이 혼연일체가 된 열정 그 자체인 교육현장을 오랜만에 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오늘의 에이즈교육에 대한 만족감이 철철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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