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松肌)의 추억

 

2010 08월 어느 날,

난 새마을리더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탄자니아의 팡가웨 마을에 서 있었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니 맨발로 학교에 다녔고, 한 아이는 마른 소나무가지처럼 말라 애처로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그 곳에는 쌀도 없었고, 보리도 전무하고 국수도 없었으며 송피(松皮)마저 없었다. 따라서 영양실조에 걸리고 척박한 환경에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열의 통증에 울부짖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풀과 진흙으로 지은 움막집에서 하루 또 하루 생명을 연명하며 가난에 찌들어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상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50년 전으로 날아가 끔찍했던 한국의 생활을 회상하게 한다.

 

1960, 내 나이 7세였다.

경북 경주시 외곽 북변에 위치한 안강읍에서도 한 참 걸리는 고즈넉한 산골마을인 가마실에 살았다.

 

신발은 짚신을 신고 있었고, 복장은 헤집어진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몸은 영양실조에 걸려 버들가지처럼 흔들 거렸다.

백구 친 빡빡머리에는 부스럼헌데가 나 있는 초라한 몰골 그 자체였다.

 

배가 고프면 낫을 들고 산에 올라가 물찬 소나무 가지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 물을 빨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50년 전 아련한 추억으로 거울같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건만 요즘 아이들은 천지를 모른다. 아니 거짓말을 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훌륭한 영도자를 만나 거짓말처럼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이 땅에서 가난을 물리친 지도자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나는 자신 있게 단언한다. 나는 그분을 충심으로 존경한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가난을 물리친 지도자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훌륭한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혹자는 지나친 비약이라 할지 모르나 전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추론이다.

중학교는 고사하고 국졸도 어려웠을 것이다. 좋은 집, 좋은 차 굴리며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꿈만 같은 현실이 된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누가 뭐래도 그분의 공적은 감출 수 없고 부정(否定)하려고 애를 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여기서부터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100% 팩트로 피력하고자 한다.

1959년 봄 내 나이 6세 때, 우리 집은 매우 희망이 밝았다.

형산강 하천부지를 일구어 벼를 심었다. 아주 농사가 잘 되었다. 알알이 영근 벼 이삭을 보며 수확하여 알콩달콩 행복한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911일 우리지방에는 사라호 태풍이 몰아쳤다. 거센 바람을 동반한 폭우는 집동만한 나무도 뿌리를 뽑아버리고 홍수가 범람하여 수확진전의 벼를 한 알도 남김없이 깨끗이 쓸어 가 버렸다. 난 아직도 강바닥에 앉아 망연자실하여 흐느끼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쌀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를 목격하며 살았기에

가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1961년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이었다.

난 매일 약4km 거리에 위치한 학교를 오가며 가난에 허덕이는 무수한 광경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주린 배를 움켜지고 바가지를 들고 조금 잘 사는 집에 들어가 “밥좀 주이소!”하는 가는 목소리의 소녀를 목격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학교에 출석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우선 가족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정작 나는 더 가난하여 몇몇 날을 굶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렇게 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중식시간에는 동무들의 밥을 얻어먹기 보다는 수돗가에 가서 물을 들이켜 배를 채우는 가식이 나를 옴짝 달싹 못하게 했다.

 

길가의 논에 도열병 같은 병균이 돌아 헛열매가 많이 보이던 해의 이듬해 보릿고개는 더 혹독했다. 깊은 산에는 칡뿌리를 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름 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감꽃이 떨어지면 감꽃을 먹고, 참꽃이 피면 참꽃을 먹었다.

 

그해 가을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할 것처럼 낮게 맴돌며 빙빙 돌더니 하늘에서 종이를 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그 때 보갓산 산마루에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재빨리 형산강 지류인 칠평천 조약돌 위로 달음박질 쳤다.

 

하늘에서는 사각의 종이(A-5 용지)가 뱀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을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철없이 아등바등 거렸다. 한 묶음을 주워 아주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종이에는“재건 건설”이라는 표제 문구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 박정희라는 영웅이 나타났다.”라고 말씀하셨다.

5.16 혁명으로 이 땅에 부정부패(正腐敗)를 일소하고 나라를 부강 시킬 것이라고 예단하셨다.

그 당시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왜냐하면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우유가 어린이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강냉이 죽도 끓어서 우리들에게 배분해 주었기 때문에 배가 든든했다. 원조를 제공해준 그 분들에게 나는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난 아직도 그 고마움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잊을 수가 없다.

 

비록 교실이 부족하여 그늘나무 아래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공부했지만 늘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또한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 오후반으로 이등분하여 수업을 받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형산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어서 비가 많이 내리면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외사촌 형과 개울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송어, 메기, 미꾸라지 그리고 엄청 재수가 좋은 날에는 뱀장어도 잡는 행운도 따랐다.

그러다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호롱불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었으니까.

그 때는 호롱불이 밝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전기가 들어오고는 신천지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인 1962년부터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하였다. 당시의 국민소득 수준이 91달러였다. 얼마나 가난한 국가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나는 “농공병진정책”이라는 현수막이 읍사무소 담장에 걸린 것도 그 때 보았다.

농업으로 살아가는 원시적 생활양식이었기에 흉년이 들거나 홍수가 지는 년도에는 더 어렵게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나는 사실상 보릿고개가 그렇게 매서운지를 몰랐다. 초봄에는 장사꾼이 들어와 어머니와 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곤 했다.

그 돈으로 양식을 팔아 밥을 먹을 때는 어린 나이지만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와 누이에게 미안했다.

그 때 라디오 방송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 또렷하게 흘러 나왔다. 가난은 우리 세대에 끝내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감했다.

나는 열심히 배우고 근면하게 생활하여 가난을 물리치는 선봉에 서리라 굳게 다짐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아주 어렵게 마쳤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는 사실을 잘 아는 나는 포기할 마음을 수차례 가졌다. 하지만 부모님과 누이의 교육열에 힘입어 안강중학교에 진학했다.

 

우리 마을에서 동급생이 4명 있었는데, 가장 가난했던 나 혼자만 진학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생활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나무도 하고 보리 짚을 이용한 수공작업도 열심히 했다. 또 그 당시에 우리 집 먹는 물(食水)은 어머니가 1km 정도 떨어진 샘물을 바가지로 떠서 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산을 넘어 집으로 운반해 오셨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무지개로 나르기도 했다. 그리고 토끼와 같은 가축도 키웠다. 그리고 또 다른 수입원인 산토끼와 꿩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밀엽금지와 같은 단속이 없었다.

누구나 사이나라 불리는 청산가리를 구입해서 콩을 파서 약을 넣고 초로 봉하여 꿩이 많이 앉는 지역에 줄을 지어 놓거나 찔레나무 열매를 갈라 약을 넣고 초로 봉하여 보리밭 언저리에 놓아두었다.

달밤에 토끼가 내려와 이를 먹으면 즉사하는 것이다. 꿩은 이를 먹고 그 자리에 즉사하는 경우도 있고 멀리 날아가서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면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으로 향했다.

어떤 날에는 다섯 마리 또 어떤 날에는 열 마리 이상도 수거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통말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다. 초저녁에 통말을 놓고 새벽 03:00분경 공동묘지를 지나 산 하나를 넘어 통말을 수거하러 다녔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의 한계였다.

1968.12.05.일에는 역사적인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마력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헌장의 취지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진지하게만 다가왔다.

 

 

 

 

 

 

 

이런 세월도 빨리 지나가고 나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도 전기불이 들어왔다. 새마을 구판장도 생기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넘쳐났다.

 

동네마다 일정량의 새마을 시멘트가 균등하게 배부되고 지붕개량사업, 부엌 환경개선사업, 화장실 개선사업 등이 경쟁적으로 실시 집행되었다.

나는 마을 부역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가했다. 한집에 한사람은 무조건 의무적으로 참가하여 마을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부역이다.

우선 28번 국도가 비포장 도로였기에 비가 오면 유실되고 파이어 보수작업이 필요했다. 우리 마을의 담당구간은 하곡저수지 인근으로 기억 된다. 자갈을 깔고 다지는 일을 했다. 새참 시간에는 내가 가장 어린 나이 이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막걸리를 부어 드리는 일을 전담했다. 술 치는 법을 그 때 배웠다.

다음은 마을의 물길을 여는 부역이다. 한해(旱害)가 되면 강바닥을 파서 물이 농토를 들어가도록 물길을 내는 일을 협동 삽 등을 이용하여 하염없이 일을 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아래 마을 사람들이 단결하여 마을길을 넓히고 다리도 건설하고 획기적인 건설작업이 날마다 집행되었다.

가장 기억나는 사업을 꼽으라면 나는 녹화사업을 꼽는다. 그 때 산은 헐벗은 산이 많았다. 이를 푸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 하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는데, 나도 참여 했다.

일렬로 정리된 산의 나무가 보기가 좋다고 하여 못줄을 양쪽에서 당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나무를 심었다.

밤나무와 같은 유실수를 많이 심었으며 하루에 일정액의 돈을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결과 지금은 숲도 푸르고 그 과일을 풍족하게 따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유익한 사업이었던가?

그리고 자급자족이라는 큰 목적아래 통일벼가 연구되고 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가난이라는 것이 물안개처럼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쥐잡기 운동을 할 때는 쥐꼬리를 잡아 학교에 가서 검사를 하기도 했다.

혼식분식 장려운동을 할 때는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어 검사를 밭고 식사를 했다. 마을마다 꽃길 가꾸기 운동도 했다. 길 양 옆으로 코스모스를 심어 하늘거리는 꽃길을 걸어가던 그날이 그립다. 회충퇴치운동 등 가지가지 운동으로 국민들을 계도했다.

 

우리 마을에는 50호가 옹기종기 살았는데, 두 집을 제외하곤 전부 초가집이었다.

해마다 새로운 짚으로 단장을 하는데 위험한 일이라 추락하여 다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스레트 지붕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역시 협동사업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우리 마을엔 매탄가스를 이용하기 위하여 마당 언저리에 콘크리트탱크를 설치하여 관로를 연결하는 작업도 했다. 마을에서 단합하여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니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새마을 부녀회에서는 새마을 구판장 사업도 발전적으로 개선하여 시행하였다.

 

그 때는 살기가 바빠서 화장실의 청결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로 바뀌고 다시 양변기로 바뀐 다음 요즘은 비데가 설치된 최고의 화장실로 변화되어 이제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거지나라에서 국민소득 30,000만 불에 육박하는 부유한 나라로 바뀌어 6,25참전 외국인 용사들이 다시 한국을 찾아보곤 감동한다고 한다.

우리는 지원받는 나라에서 지원하는 나라로 바뀌어 세계 도처에 해외봉사단 요원들이 한국국제협력단을 통해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우유와 강냉이 죽을 얻어먹고 자란 그 빚을 갚으러 아프리카로 갔다.

그 나라 고급관리가 내게 물었다. “대한민국은 이디오피아로부터도 지원 받은 가난한 나라가 분명한데 어찌하여 단시간에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가?”라고 하여 나는 서슴없이 새마을 운동과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을 알려 주었다.

 

그는 감탄을 연발했고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것을 부러워했다.

나는 탄자니아에서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배운 그대로 백만 평의 국유지가 있다하여 그 곳을 답사하여 그 땅에 많은 량의 유실수를 그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심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많은 과일이 열리고 이를 팔아 마을 소득증대를 한다고 소식을 전하여 오니 무척 흐뭇하다. 그리고 이곳은 물이 귀해 옛날의 우리나라 어머니들처럼 머리에 옹기를 이고 원거리를 물을 운반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숙란간호사 선생님과 힘을 합하여 급수원을 개발하고 공병장교로 근무하던 때 익힌 기술로 물탱크와 급수관로를 연결하여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졸졸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주고 귀국했다.

지금도 그 물로 식수를 하고도 남아 농수로 활용한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내가 체험한 바로는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옛날 60년대 우리나라 농촌의 인심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기회가 온다면 다시 그들을 돕고 싶다. 어린 시절. 우리 또래가 자랄 때 가난에 허덕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갈망했듯이 그들도 지금 누군가의 도움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리라.

 

한편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사회로의 전환으로 물질문명은 풍족해 졌지만 정신적 측면은 따라오지 못했다고 나는 감히 단언 한다.

오히려 후퇴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공영의 원칙도 잊은 체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사회가 된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해외봉사활동을 종료하고 귀국하여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일했다.

나는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참 많았다.

 

세대차가 난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란 박정희대통령의 어록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현실이다.

어쩌면 이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투철한 국가관은 여러 대통령을 거치면서 또는 전교조 교사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에 따라 많은 부분 희석되어 왔다. 우리 기성세대에도 일말의 책임은 있을 것이 명백하다.

 

나는 2017 12월 격분하였다.

표창원이라는 국회의원이 감히 박근혜대통령의 나체사진을 국회에 전시한 사건이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건천궁에서 시해 당한 후 우리 국민들이 분해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하물며 살아계시는 대통령을 욕보인 ‘더러운 잠 그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패륜행위(悖倫行爲)로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표창원에게 살의(殺意)를 느꼈다.

 

그 길로 바로 주섬주섬 옷가지를 가방에 넣어 서울행 열차에 올라탔다.

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곧장 시청 앞 광장 켈로 부대에 입소하여 천막에서 6개월을 지냈다.

나는 그 곳에서 시련의 시간을 보내며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인내의 시간은 보냈다.

서울의 바람은 매서웠다.

처음에는 눈이 내린 땅에서 잠자는 바닥에서 질퍽질퍽 물이 올라왔다. 새우잠을 자고나니 온 몸이 부슬부슬하다. 새벽에 지하철운행시간을 기다렸다가 지하철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마치고 다시 근무에 돌입했다. 아침밥은 라면 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우리는 서울시청 용역들과 자주 충돌했다. 오늘은 스치로플과 부직포가 들어 왔는데 그것도 반입을 불허했다. 탄기국 민중홍 사무총장이 차에 올라가 그들과 대면했다. 그가 던지는 부직포를 날렵하게 받아서 본부로 이동했다. 용역이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오늘은 밥값을 제대로 했구만...”라고 자화자찬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텐트 안이 추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소변이 마려울 때 고통스러웠다. 지하철 화장실도 밤 01시에는 문을 잠그고 서울시청 화장실도 자정 넘어 야속하게 문을 잠근다.

염치불구하고 프라자호텔로 들어가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나는 박정희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박근혜대통령도 충심으로 존경한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도 박정희대통령은 치밀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 국민들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 분이시다.

그리고 박근혜대통령은 두 분의 부모님을 불의의 총탄에 잃고도 흔들림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해 오신 진정한 국모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대통령 탄액은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 일축한다.

기획된 모략이고 중상이며 음해일 뿐이다.

나는 시청 앞 천막 속에서 거주하며 태극기부대가 위험한 곳에는 다 출장을 다녔다. 그리고 촛불세력의 광기를 목격했다.  광화문에서는 축구공에 박근혜대통령의 얼굴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차도록 하는 만행을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또 대통령을 겁박하는 단두대를 설치하고 대통령 마네킹형상을 만들어 동아줄로 묶어서 끌고 다니고 심지어는 국회 앞에 버젓이 팽개쳐 두기도 했다. 나는 이때부터 국회의원을 불신했다.

김진태의원을 제외하고는 단 한사람도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태극기 동지들은 국개의원이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보신각에서는 모의 창살을 만들어 대통령님 형상을 가두어 끌고 다니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도 목격했다.

나는 이석기 석방 등을 외치는 그들이 한없이 미웠다.

2017 310일 파면권이 없는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던 날, 나는 소위 헌법재판소 공격의 선봉에 서 있었다.

 

스피커가 떨어져 사망한 애국열사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그날 이상하게도 미리 결과정보를 안 경찰은 전북경찰을 서울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우리가 겹겹이 친 경찰의 방어벽을 뚫기는 사실상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4명의 열사들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날은 우리 애국동지들의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직 우리 박근혜대통령을 위하여 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뿐이었다.

내 바로 앞의 켈로 요원은 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앞니 4개를 잃었다. 나는 왼쪽방향으로 공격했다. 앞사람이 넘어 지면서 연쇄적으로 넘어졌다. 나도 무수한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ᄁᆞᆯ렸다.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죽는 구나!” 라는 가는 소리와 함께 죽음의 공포감이 나를 엄습했다.

마침 배낭을 메고 사람더미에 깔렸기에 배낭이 다소의 완충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인대확장으로 대구의 연합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날은 아픈 줄도 몰랐다. 다시 일어나 헌재 방향으로 전진을 감행했다.

버스를 용감하게 타고 넘는 백하순 동지도 보였고,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은 각개전투를 낮은 포복으로 버스 아래를 포복하여 통과하는 박창숙 동지의 용맹한 모습도 목격 되었다.

그들 주부들은 모두 억울한 박근혜대통령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뿐이었다.

애국의 대열에서 내가 목격한 바로는 70대가 가장 용감했다.

버스위에서 항거하다가 건장한 청년 4명이 올라가 집어 던져진 사람도 70대요, 스피커에 맞아 죽은 사람도 70대다. 그들 열사들은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기를 반복하여 안국역 2번 출구 황금정 앞까지 진출했다.

그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역시 70대로 보이는 애국자가 황금정 지붕 위 바로 내 머리 위에서 긴 각목을 들고 경찰에 대항했다.

하지만 의경 5명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올라가 애국자를 제압했다.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소리까지는 들었다. 지붕아래에서 아줌마들은 “경찰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나는 아직도 그 분의 안위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우리는 그날 너무나 분개하여 헌법재판소로 나아갔지만 미리 올라온 전북경찰의 봉쇄작전에 밀려 기껏 황금정 앞에 집결하여 철수를 강요받았다.

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천막 속에 머물며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다.

난 대통령 삼성동사저에도 수차례 가서 맞은 편 옥상에서 카메라를 들고하루 종일 사생활을 침해하는 기자를 향하여 분노의 돌멩이를 과감하게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서청대(서울구치소)앞에서 연설도 하고 편지도 보내고 울부짖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양재동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내곡동 사저에 가 보기도 했다.

 

지금 나라가 걱정이다.

비봉출판사에서 발간한 이주성씨의 『보랏빛 호수』를 읽고 5.18은 분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하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지금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국민들이 대오 각성하여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지켜온 대한민국인데 결단코 좌익세력에게 넘길 수는 없다.

나의 일련의 행동은 영웅심도 공명심도 아니다.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대통령 덕분에 일평생 잘 살아왔다. 그 큰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의 실상이다.

특히 어린 시절 가난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체험한 사람들 중의 일원으로 가난에서 구출해 주신 우리 박정희 대통령의 공덕은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이 한없이 크다.

그렇다.

대대로 이어 온 무서운 가난은 박정희 대통령이 종식시킨 것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고 위대한 업적이다. ()

 

 

                                     손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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