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오늘 산책은 망우당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금호강(화랑교)를 건너면 바로 일본을 향하여 말을 타고
호령하시는 의병장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흰색 무궁화를 위시하여 배룡나무(백일홍) 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조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난국의 시대에는 진정한 의병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나신 장군님의 동상에 기대어 한 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답니다.
죄 없는 우리 박근햬대통령님을 구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구하는 길임을 알 것만 같습니다.
전 2018.09.18 20:00 MBC뉴스 스쳐가는 화면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북한의 건물벽에 붙어 있는 현수막에 "우리(북한)는 반드시 승리 한다." 라고 붙어 있더군요.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이지만, 전 보았어요.
그렇다면 저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도 평화는 속임수이고 기실은 최종목표가 적화라는 것을 반증하는
분명한 증거일 수 있다고 전 주장합니다.
나라가 평화가 아니라 사실은 풍전등화입니다.

여기에는 가을 비가 눈물처럼 하염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만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은 오래 전에 이미 오늘의 시태를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안강의 발전은 요원한 일인가? 회갑맞은 안강읍승격 61주년에 부쳐

  2010년 05월 29일 (토) 19:43:09 편집부 press@srbsm.co.kr  
     
▲ 손승호 시민기자

2010년 5월20일은 안강이 읍으로 승격한지 61주년이 되는 의미 깊은 날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뜻하는 61세가 되는 생일이다.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회갑(回甲)잔치가 성대하게 열리는 날이지만 안강읍에서는 아무런 기념식도 없었다.

 

안강읍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기념식은 10년마다 한 번 열린다고 했다.
다만 여느 도시의 동(洞)사보다 못한 초라한 읍사무소 건물이 쇠락(衰落)한 안강의 오늘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일부러 대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강으로 향했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상가마다 학생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경산시 하양을 지나니 제4경마장을 유치해 연간세수 900억원의 기대수치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에 들뜬 희망의 함성이 진동하는 영천시에 정차했다.

그리고 3사관학교가 위치한 고경면을 지나니 어느새 안강의 경계를 알리는 시티재가 나타났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안강 들판의 농수를 책임지는 하곡저수지의 파구가 바람에 순응하여 찰랑거렸다.

 

길옆의 옥토에서는 성질 급한 감자꽃이 피었으며 간간히 농민들의 일하는 모습이 보이고 뒤편의 논에는 농번기를 알리는 황토색 물에서 윤기가 났다. 웃자란 수목과 잡초, 그리고 산새들만이 이 고장이 편안한 安康(안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강 시외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읍내로 접어들면 상가는 한산하기 짝이 없고, 사람들은 그 표정에서 무언가 침울함이 풍긴다.

 

왜? 무엇 때문에 안강은 발전이 안 되는지? 심히 의아스럽기만 하다.


가까운 흥해읍은 1956년 곡강면과 흥해면을 합쳐 의창면으로 개칭 됐다가 안강읍보다 20여년 늦은 1973년에 흥해읍으로 승격됐으나 오늘날은 대형국책사업으로 전국의 투기꾼이 득실대는 곳으로 변화해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않는가.

 

같은 경주시 서부에 위치한 건천읍은 또 어떤가?  건천 강물이 배수가 잘 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건조하여 한발이 심해 건천이라고 하였다지만 이제는 경주 신역사가 들어서고 양성자가속기 부지를 유치하여 발전의 기폭제를 마련하지 않았는가.

 

때마침 안강 거리에는 지방선거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저마다 안강의 발전을 목청 높게 외치며 관심을 촉구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안강의 발전은 그때마다 구호로 끝나고 말았다.

 

경주의 변방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되돌아보면, 안강풍산금속 폭발사고, 쌀값하락에 절망한 농민들의 벼논 뒤엎기, 오리·닭 살처분 매몰, 구제역예방 등 우울한 사연들이 많다.
“미안하다. 다시 기회를 달라.”는 확성기의 유세소음에 그저 쓴웃음이 나온다.

 

정녕 안강의 발전을 충심으로 기약한다면, “제발, 가까운 읍민등산로 근계산에 올라가서라도 안강읍 전체를 한 번 쯤 세세하게 내려 보세요.”
그리고 얼마나 안강이 정체되고 있는지 되짚어 보았으면 참 좋겠다.

 

영천시민들은 경마장 유치를 위해 신청서 접수와 함께 단 3일만에 무려 2만6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마사회에 제출하는 결집된 모습을 보였다. 우리 안강읍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강읍 승격 61년의 침체된 역사의 뒤안길에서 향후 안강의 발전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대오각성하여 발전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회갑(回甲)은 과거, 진갑(進甲)은 미래라는 말이 떠오른다.
내년에는 현실의 안주 의식에서 과감하게 탈피한 비약적 안강발전의 청사진이 제시되어 읍민들의 보다 밝은 모습을 기대해 본다.

손승호 시민기자 ssh30529@hanmail.net

시각장애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손된 점자블록,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9기 인권기자 손승호

   

오월의 훈풍이 불어온다.

금호강변의 둔치에는 형형색색의 들꽃이 피어 진한 향기를 내뿜어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다. 이렇게 좋은 봄날엔 강아지도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몸부림치는데, 사람이야 오죽 하겠는가? 마음이 아픈 사람이나 몸이 다소 불편한 사람도 광야로 나가 자연의 치유나 회복을 간절하게 원한다.

   

대구 동구에 위치한 퀸벨호텔 앞 왕복 8차선 버스정류장 근처이다. 반대편에는 강남병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금호강 둔치로 가는 진입도로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인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곳에서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더듬으며 서성거리고 있는 광경을 라일락 꽃 향기가 짙은 사월 중순에 보았다. 점자블록을 따라 가 보았더니 노란색 점자블록이 파손되어 조각난 파편을 누군가가 치우고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당연히 이상을 감지한 것이다.

   

   

                                                         ▲ 퀸벨호텔 앞 인도에 점자블록 일부가 파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보수를 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난 후 또 가 보았다. 한 달이 경과하여도 그대로였다. 이제 두 달이 다가온다. 행정기관에서도 그 누구도 무관심할 뿐이다. 시각장애인들의 보행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분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좌시하고 사소한 일로 여기니 한심한 일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점자블록 고급품이 장당 오천원 미만이었다. 이렇다면 예산을 탓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우리 눈은 갑자기 나빠질 수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예비 시각장애인인지 모른다. 제발 관심을 갖고 장애인의 애로사항을 신속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

   

오늘도 호텔 앞에는 리무진 관광버스가 육중한 몸체로 점자블록 바로 옆에 주차해 있다. “버스 기사님! 배려하는 마음으로 약한 점자블록이 파손되지 않도록 관심 좀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결박 당한 나무들의 아우성(말은 못하지만...)

 

형제봉 등산로 그리고 쉼터의 개선을 제안한다.

- 결박당한 나무들의 아우성

   

9기 인권기자 손승호

   

망우당 공원은 대구시민의 대표적 휴식처이다. 요즘 이 일대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신 곽재우 장군의 동상 앞에 서서 숙연(肅然)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신록(新綠)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등산복차림으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어디론가 간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들의 뒤를 따랐다. 화랑교 입구를 가로 지르는 도보교를 지나니 지근거리에 서울의 숭례문에 견줄만한 대구 읍성의 남대문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위용(威容)을 뽐내고 있었다.

   

이어서 인터불고 호텔로 진입하는 도로를 횡단하니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있다. 그 측면에는 사이클 경기장이 있는데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맑은 공기를 내뿜고 있어 우울하던 기분도 어느새 상쾌하게 변했다. 새삼 나무의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잠시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경부선 철로위에 구축된 육교를 통과하니 저만치 정겨운 야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기가 접근성이 탁월한 동구와 수성구 주민을 비롯한 대구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형제봉이다. 종합안내도에는 제봉(弟峰)과 형봉(兄峰) 그리고 모명재(慕明齋)로 가는 등산로(登山路)가 비교적 잘 표기되어 있다.

   

초입에 들어서니 상큼한 아카시아 꽃향기의 여운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다. 지나가는 봄이 아쉬워 마지막 여력을 발산하는 모양이다. 이곳은 가벼운 등산 코스로 적당하다. 그래서 아이들도 노인들도 예상보다 많은 시민들이 산을 오른다. 산의 흙길이 깨어진 거울처럼 반들반들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음의 휴식을 원하기 때문에 이 길을 왕복한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흔적이다.

   

조그만 능선을 하나 넘으니 숲속에 제봉건강쉼터가 보였다. 찻집도 있고 헬스장도 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다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등산객을 위해서 누군가가 그네를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두꺼운 밧줄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나무를 칭칭 감아 돌리고 묶고 틀고 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여 완성해 놓았다.

   

                                    ▲ 누군가 나무와 나무를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여 그네를 만들어 두었다

   

할머니 한 분이 그네를 탔다. 안락한 즐거움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참나무는 비명을 질렀다. “끼익 끼익” 난데없는 쇠 소리가 난다. “찌그덕 찌그덕” 아픔을 견디는 나무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삐익 삐익” 알 수도 없는 몸부림의 괴성이 송운(松韻)과 더불어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나무가 부패하면서 실재 조금씩 말라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잘 정리된 헬스장, 찻집의 천막, 등산로 주변의 사이사이에 일정한 나무들은 모두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소나무에는 못질을 하거나 철사로 결박한 곳도 있다. 느티나무에는 기(氣)를 받기 위해서 고무줄로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 줄을 잡고 힘을 가하여 당기고 등으로 나무를 쾅쾅 치도록 설치 된 것이다. 아카시아 나무에는 나무를 덧대어 못을 쳐서 사람들이 짚고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아카시아는 마른 꽃잎에서 향기를 뿜고 있다. 그 양태가 한없이 애련하다.

 

   

▲ 소나무에 못질을 하거나 철사로 결박하였다.

   

살아있는 나무에 못질이나 결박을 하는 이런 행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바로 개선(改善)되어야 한다. 관할 수성구청이나 대구시는 찻집의 주인이나 헬스장의 관리인을 탓하지 말고 이른 기간 내에 현장을 확인하고 불특정 다수 시민들의 휴식권을 위하여 바로 개선 작업을 집행했으면 좋겠다.

   

최소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관 파이프 등을 활용하여 용접작업을 한 다음에 도색을 완료하면 생나무에 밧줄의 그네와 같은 쉼터의 흉한 실상(實相)을 단시간에 만족할 수준으로 교체 할 수 있다. 나무들은 참혹한 고문(拷問)으로 부터 해방(解放)해서 좋고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산소를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나무에 못질을 하여 거울을 달고 오르막길에는 안전을 목적으로 한다는 구실로 밧줄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난간 줄로 삼고 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흉물이 한 두 장소가 아니다.

   

 

                                   ▲ 생나무에 못질을 하여 거울을 달고, 오르막길에 밧줄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난간 줄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 형제봉에는 전설이 숨 쉬는 곳이다. 제봉에 적힌 내력을 요약하면, 아주 옛날에 힘이 장사인 남매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오빠와 누이가 서로 자기가 힘이 세다고 다툼을 벌이다가 누가 정녕 힘이 센지 높은 산을 쌓는 내기를 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오빠는 저고리로 누이는 치마폭으로 흙을 날랐다. 서산으로 해가 사라질 무렵에 오빠가 옆을 훔쳐보니 누이가 쌓은 산이 훨씬 높은 것을 보았다. 심술이 나서 동생의 산을 밟아 버렸다. 그래서 동생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힘은 천하장사이지만 인성은 부족하구나! 나의 부덕의 소치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실망했다. 오빠가 쌓은 높은 봉우리가 형봉(192m)이고 밟힌 모양의 작은 봉우리가 제봉(170m)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이를 바라보는 형상의 봉우리가 모봉(母峰:149m)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속이 상해 집을 떠나 고개를 넘었는데, 막상 남매 걱정에 집을 향해 뒤돌아 보았다하여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 자를 써서 고모령(顧母嶺)이라 부른다. 또한 명나라 최고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최고의 명당으로 꼽은 길지이다.

   

사람들에게 시사(示唆) 하는 점이 많은 전설을 간직한 형제봉에 녹색의 바람이 불어온다. 산 아래 금호강의 물결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오리배가 동동 떠다닌다. 새들이 풀밭에서 여기저기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가 결박당한 나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으로 하산했다.

   

조만간에 여기 형제봉의 생나무에 박힌 못은 제거하고 밧줄과 철사도 풀어서 죽어가는 나무를 살리는 실질적인 개선효과를 진솔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결론적으로 결박당한 나무를 보호하는 작은 정성으로 세세한 정비를 한다면 대구시민의 건강지킴이 형제봉은 훌륭한 등산로와 쉼터로 변모(變貌) 될 것이다.

노예시장 답사기

-인권의 매몰(埋沒)-

 

연일 폭염(暴炎)이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대구는 어느새 대프리카라는 별칭을 얻었다.

열대야 현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문득 아프리카가 생각난다.

 

2010년 나는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동부아프리카에 위치한 탄자니아에 가기 위하여 비행기에 탑승했다. 평균고도 38.91피트, 560mph의 스피드로 7,307km9시간 20분 동안 날아 일단의 경유지인 두바이 공항에 착륙했다.

 

220번 게이트에서 45도 각도로 바라보니 두바이 사막에 세워진 세계 최고층 건축물인 부르즈 칼리파의 꼭대기에서 발산하는 불빛이 보였다. 저 건물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삼성물산에서 최첨단 기술로 시공한 높이 828m163층 구조의 자랑스러운 건물이다. 준공 한 지 몇 개월 경과하지 않은 그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조국의 우월성에 환호(歡呼)하였다.

 

우리들은 밤 11시경 다시 아랍에미레이트 항공기에 탑승하여 3,935km를 더 비행하여 현지시간 1520분에 검은 대륙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수도 다르살람에서 체류하여 현지 언어를 익히며 지내다가 한 달 후에는 내륙으로 3시간 정도 거리인 모르고로 시티로 이동하여 거소(居所)를 정한 다음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1시간 정도 달려 최종 목적지인 팡가웨 마을로 들어갔다.

 

코코넛 나무가 울창한 아름다운 그 마을에서 2011년까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흑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비록 가난하게는 살지만 소박하고 인정이 많은 마을 사람들과 금방 친하게 지냈고 의사소통도 나름대로 원활했다.

 

나는 장래의 소득증대가 목적인 녹화사업 일환으로 망고,아보카도, 오랜지 나무 등을 야산에 심었고, 독일 간호사 출신으로 봉사정신이 누구보다 투철한 간호사님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높은 산에 올라가 샘을 찾아 물탱크와 파이프 라인을 연결하여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물을 나르는 부녀자들이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도록 산 위에서 내려오는 자연 수압을 이용하여 산 아래 마을 초입에서 수도꼭지에서도 물이 나오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가끔은 청소년들에게 새마을 교육도 시키고, 간호사님의 간호사업도 도우며 그들을 살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했기에 입술이 찢어지고 발이 부릅 트고 피가 나도록 마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고동락 생활했다. 그들은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인권은 미약하였다.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사람도 많았다.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삼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가가호호 방문을 해 보았을 때, 에어컨 냉장고는 물론이거니와 선풍기 한 대도 없었다. 사실 그러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기장도 제대로 설치 할 수 없는 사정이니 모기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려 보건실을 찾아오는 아기들의 온도를 측정해 보면 무려 40도를 오르내렸다. 약을 구입 할 형편도 안 되니 그저 운명으로 받아드리는 길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등에 파묻혀 있는 고열의 아이들은 울지도 않았다. 다만 이를 악물고 있을 뿐...

 

어느 날, 녹화사업을 하던 산에서 한 흑인으로부터 노예사냥과 노예시장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살았던 시절의 비극적 실화로

동부에 위치한 잔지바르에 가면 노예시장이 있다고 했다. 나는 노예무역의 거점인 잔지바르에 꼭 한 번 가리라 마음먹었다.

 

동아프리카 내륙에서 서양인들의 소위 노예사냥으로 잡힌 노예들이 바다 건너 아랍과 미국으로 보내지기 전에 잔지바르 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노예시장에서 경매나 기타 거래로 마치 동물시장의 가축처럼 매매를 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드디어 2011613, 다르살람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의 심해를 1시간 반 정도 통과하여 인구의 약90%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잔지바르 섬에 입도했다. 옥색 바다와 우유 색 모래가 펼쳐진 풍광이 기가 막혔다.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100대 여행지에 선정된 잔지바르 섬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이 곳이 과거 노예시장의 거점 이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스톤타운에서 노예시장은 쉽게 접근 할 수 있었다. 노예시장 터의 뜰에는 비극의 역사를 대변 하듯이 조형물이 있었는데, 다섯 사람의 노예가 쇠사슬에 칭칭 묶여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쇠사슬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표정이 확연하게 보였다. 숙연한 마음으로 노예들을 바라보며 눈물이 쏟아 내릴 것 같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인 체 한꺼번에 갇혀 있었다고 하니 대소변 문제와 냄새 등의 몰골이 상상만 해도 끔찍할 따름이다. 책자를 보니 16세기 포루투칼 침공 후에 오만 술탄의 통치아래 노예시장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현지인에 의하면 1873년 까지 오후 4시경에 시장판이 열렸고, 노예가 강하게 보여 보다 비싼 값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기름을 온 몸에 칠하기도 하며 악세사리 장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실제 노예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 있었던 장소에 들어 가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구토증세가 나고 화생방 가스실에 들어갔을 때 보다 더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참으로 음침하고 낮은 천장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만 사람 하나가 지나 갈 수가 있었다. 막장에 가니 마루로 보이는 공간이 양쪽에 있었는데, 이 곳에서 보통 한 달을 버티어야만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튼 날에는 잔지바르 바닷가로 나가 모험심이 발동하여 배 삯을 충분하게 지급하고 쪽배를 타고 노예섬으로 갔다. 물결이 센 바닷물을 아슬아슬하게 이동하여 20분을 더 가니 악명 높은 노예섬의 감옥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지금은 1m 길이의 바다거북이 백여 마리만이 사람들을 반겨 주고 옛날의 감옥은 그 비극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대로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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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감옥에서도 수많은 노예들이 회초리로 맞아 견디지 못하고 죽으면 바로 바다에 던져 버리는 악행이 인간에 의해서 저질러졌던 것이다. 안내인으로부터 참혹했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노예들의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무역의 주요한 축은 다름 아닌 인간 노예였다. 4백년 동안에 약 백만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잔지바르를 거쳐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19세기 가장 강력하게 잔지바르를 지배한 아랍계의 술탄이 바다에서 생선을 잡듯이 아프리카 각지에서 노예들을 사냥해 인도양 건너 다른 나라에 팔기 위해 쇠사슬을 줄줄이 엮어 생선 박스나 돼지우리 보다 통풍이 안 되는 쪽방 감옥에 보관 했다가 팔려 나간 노예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애달픈 역사를 지닌 탄자니아 사람들...!

착한 그들과 함께 웃고 울던 시간들이 세월이 흘러가니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슬픈 기억을 회상 할 때마다 마음은 한없이 아프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과 인격을 짓밟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인 일인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에도 한 때는 노예 매매가 성행하였고 조선조 26대 고종 31(1894)에야 비로소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노예전적의 폐기와 노예매매를 금지하게 되었지 아니한가?

 

나는 노예시장과 노예섬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과거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도 지금부터 라도 인권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미약하고 부족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비록 작은 일이라도 관심을 갖기로 굳게 결심했다.

 

 

 

 

 

9기 인권기자 손승호

 

                  

        ▲ 6.25 전쟁 제66주년 기념식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이 발발한지 66년이 된다. 나는 오전 10시 대구 동구청 강당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여 홍안의 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령(英靈)께 머리 숙여 명복을 빌고 미망인을 비롯한 남은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묵념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반월당 지하철역 만남의 장소에서 전시된 사진전을 살펴보고 그날의 참화를 상기하였다.

 

                        

              ▲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반월당 ‘만남의 장소’에 전시된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핵무장과 미사일 발사로 자유세계를 위협하며 날이 갈수록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만약에 북괴군이 남침을 해 온다면, 선조들이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온 이 강산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왜냐하면, 국민안전처가 최근에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전국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과 대학생 1,000명을 표본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물의 한 단면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해외 체류 시 성인 40.9%, 대학생 19.9%만이 ‘최대한 빨리 귀국해 참전하겠다.’고 답했다. 또 전쟁 상황에서 성인은 국가가 우선이라고 답한 반면, 대학생은 ‘국가 보다 개인이나 가정이 우선’이라고 응답했다.

   

 

우리나라는 당시의 가난한 환경에서 풍요로운 세상으로 변모되었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유공자나 그 유가족에게 훈공에 상당한 보답을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 책무라고 해도 틀리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6.25에 기인하여 비참하게 살아 온 음지의 일부 사람들은 국가가 원망스럽다. 마땅히 보훈 받아야 할 유가족이 국가로부터 외면 받아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여 아무런 보훈도 없이 살아가는 소수의 미망인과 유가족들에게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경주에 살았던 A씨는 6.25 전쟁 때 40대초의 나이로 안강전투에서 보급 노무자로 차출되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지개로 보급품을 지고 고지로 다시 능선으로 이동하며 참여하였다.

   

 

그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평생을 불우하게 보내시고 유명을 달리하셨다. 단 한 차례도 국가보훈을 거론한 적은 없었다. 함께 참여했던 같은 마을의 사람들도 세월이 흘러 모두 별세하고 마지막 증인인 미망인도 슬픈 기억을 간직한 채, 수년전 세상을 하직하였다. 따라서 모든 청구권이 소멸 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사례이다. 대구 대명동에 사는 김삼록씨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에서 자원하여 입대하여 수송보급부대에서 근무하였다. 트럭에 보급품을 적재하여 전방으로 이동 중 폭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이듬해 가을 의병제대(육본특을546호)하였다.

   

 

전쟁 중 공상으로 특별상이기장을 수여 받았음에도 아무런 보훈도 입지 못하였다. 병환으로 오랜 세월을 고생하시다가 1974년 11월 파상풍으로 작고하셨다. 그 고통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생전에 보훈 청구를 하려고 하면 할아버지의 호통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사내대장부가 국가를 위해 전선에 나가 다친 것을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못난 짓이다.”라고 꾸짖으며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고 한다. 급기야 참척(慘慽)의 비통함을 당하자 모든 유품을 불태워 흔적을 지워 버렸다. 올곧은 애국심은 아들의 보훈도 묻어 버린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성장하여 연로하신 모친을 위해서 보훈처에 수차례 사실의 확인을 요청하였으나 ‘일부인정 흉부’라고 하면서도 ‘해당없음’ 처분을 반복하는 것이 야속하기만 하다.

   

 

야전병원의 치료 기록마저 “잘 모르겠다.”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부친의 공훈이 부친의 군번 바로 앞의 다른 사람인 모하사관에게 착오 수여된 강한 의혹도 있으나 폐쇄적인 군의 특성상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모친께서 생존할 때 보훈을 인정받아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은 것이 간절한 희망이다. 미망인이 사망하면 청구권이 소멸되어 모든 것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고 만다.

   

 

현재 생존하신 당숙부나 모친은 그 당시의 비참했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증인이다. 하지만 그 때는 솔직히 무지해서 신청을 못했고 지금은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우니 갑갑한 마음 헤아릴 수가 없다.

   

 

이제는 국가에서 더 이상 억울한 국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열린 자세로 전환하여 아직도 6.25전쟁의 이면에 서서 보훈 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간직한 사람들을 검증하여 인권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대구인권사무소 등 관련 기관에서도 상담을 통하여 그들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한 노신사가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의 손에는 “연평해전의 영웅 박동혁 병장 보상금 3,100만원”이라는 기사를 들고 있었다. 영화 “연평해전”을 보고 댁으로 가시는 길이신지는 몰라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그 보상금이 수학여행가다 죽은 학생보다 월등하게 적은 3억도 아닌 3천만원이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나라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합당한 예우와 보훈이 있어야 할 것이다.

 

 

- 결박당한 나무들의 아우성

   

9기 인권기자 손승호

   

망우당 공원은 대구시민의 대표적 휴식처이다. 요즘 이 일대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게 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신 곽재우 장군의 동상 앞에 서서 숙연(肅然)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신록(新綠)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등산복차림으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어디론가 간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들의 뒤를 따랐다. 화랑교 입구를 가로 지르는 도보교를 지나니 지근거리에 서울의 숭례문에 견줄만한 대구 읍성의 남대문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위용(威容)을 뽐내고 있었다.

   

이어서 인터불고 호텔로 진입하는 도로를 횡단하니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있다. 그 측면에는 사이클 경기장이 있는데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맑은 공기를 내뿜고 있어 우울하던 기분도 어느새 상쾌하게 변했다. 새삼 나무의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잠시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경부선 철로위에 구축된 육교를 통과하니 저만치 정겨운 야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기가 접근성이 탁월한 동구와 수성구 주민을 비롯한 대구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형제봉이다. 종합안내도에는 제봉(弟峰)과 형봉(兄峰) 그리고 모명재(慕明齋)로 가는 등산로(登山路)가 비교적 잘 표기되어 있다.

   

초입에 들어서니 상큼한 아카시아 꽃향기의 여운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다. 지나가는 봄이 아쉬워 마지막 여력을 발산하는 모양이다. 이곳은 가벼운 등산 코스로 적당하다. 그래서 아이들도 노인들도 예상보다 많은 시민들이 산을 오른다. 산의 흙길이 깨어진 거울처럼 반들반들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음의 휴식을 원하기 때문에 이 길을 왕복한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흔적이다.

   

조그만 능선을 하나 넘으니 숲속에 제봉건강쉼터가 보였다. 찻집도 있고 헬스장도 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다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등산객을 위해서 누군가가 그네를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두꺼운 밧줄을 이용하여 살아있는 나무를 칭칭 감아 돌리고 묶고 틀고 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여 완성해 놓았다.

   

                                    ▲ 누군가 나무와 나무를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여 그네를 만들어 두었다

   

할머니 한 분이 그네를 탔다. 안락한 즐거움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참나무는 비명을 질렀다. “끼익 끼익” 난데없는 쇠 소리가 난다. “찌그덕 찌그덕” 아픔을 견디는 나무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다. “삐익 삐익” 알 수도 없는 몸부림의 괴성이 송운(松韻)과 더불어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나무가 부패하면서 실재 조금씩 말라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잘 정리된 헬스장, 찻집의 천막, 등산로 주변의 사이사이에 일정한 나무들은 모두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소나무에는 못질을 하거나 철사로 결박한 곳도 있다. 느티나무에는 기(氣)를 받기 위해서 고무줄로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 줄을 잡고 힘을 가하여 당기고 등으로 나무를 쾅쾅 치도록 설치 된 것이다. 아카시아 나무에는 나무를 덧대어 못을 쳐서 사람들이 짚고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아카시아는 마른 꽃잎에서 향기를 뿜고 있다. 그 양태가 한없이 애련하다.

 

   

▲ 소나무에 못질을 하거나 철사로 결박하였다.

   

살아있는 나무에 못질이나 결박을 하는 이런 행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바로 개선(改善)되어야 한다. 관할 수성구청이나 대구시는 찻집의 주인이나 헬스장의 관리인을 탓하지 말고 이른 기간 내에 현장을 확인하고 불특정 다수 시민들의 휴식권을 위하여 바로 개선 작업을 집행했으면 좋겠다.

   

최소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관 파이프 등을 활용하여 용접작업을 한 다음에 도색을 완료하면 생나무에 밧줄의 그네와 같은 쉼터의 흉한 실상(實相)을 단시간에 만족할 수준으로 교체 할 수 있다. 나무들은 참혹한 고문(拷問)으로 부터 해방(解放)해서 좋고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산소를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우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나무에 못질을 하여 거울을 달고 오르막길에는 안전을 목적으로 한다는 구실로 밧줄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난간 줄로 삼고 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흉물이 한 두 장소가 아니다.

   

 

                                   ▲ 생나무에 못질을 하여 거울을 달고, 오르막길에 밧줄로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여 난간 줄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 형제봉에는 전설이 숨 쉬는 곳이다. 제봉에 적힌 내력을 요약하면, 아주 옛날에 힘이 장사인 남매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오빠와 누이가 서로 자기가 힘이 세다고 다툼을 벌이다가 누가 정녕 힘이 센지 높은 산을 쌓는 내기를 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오빠는 저고리로 누이는 치마폭으로 흙을 날랐다. 서산으로 해가 사라질 무렵에 오빠가 옆을 훔쳐보니 누이가 쌓은 산이 훨씬 높은 것을 보았다. 심술이 나서 동생의 산을 밟아 버렸다. 그래서 동생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힘은 천하장사이지만 인성은 부족하구나! 나의 부덕의 소치다.”라고 중얼거리면서 실망했다. 오빠가 쌓은 높은 봉우리가 형봉(192m)이고 밟힌 모양의 작은 봉우리가 제봉(170m)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이를 바라보는 형상의 봉우리가 모봉(母峰:149m)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속이 상해 집을 떠나 고개를 넘었는데, 막상 남매 걱정에 집을 향해 뒤돌아 보았다하여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 자를 써서 고모령(顧母嶺)이라 부른다. 또한 명나라 최고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최고의 명당으로 꼽은 길지이다.

   

사람들에게 시사(示唆) 하는 점이 많은 전설을 간직한 형제봉에 녹색의 바람이 불어온다. 산 아래 금호강의 물결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오리배가 동동 떠다닌다. 새들이 풀밭에서 여기저기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가 결박당한 나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으로 하산했다.

   

조만간에 여기 형제봉의 생나무에 박힌 못은 제거하고 밧줄과 철사도 풀어서 죽어가는 나무를 살리는 실질적인 개선효과를 진솔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결론적으로 결박당한 나무를 보호하는 작은 정성으로 세세한 정비를 한다면 대구시민의 건강지킴이 형제봉은 훌륭한 등산로와 쉼터로 변모(變貌) 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개소10주년 기념 특강에 참석하기 위하여 설레는 마음을 품고 대구인권센터로 서둘러 출발했다. 교육장에 들어서니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 분위기와 온화한 대화 속에서 향기로운 사람의 냄새가 났다.

 

   나는 좌측 가장자리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귀를 기울었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강사는 ‘가위, 바위, 보’로 마을의 의사를 결정한 사례를 들어 차분하게 인권에 대하여 간과했던 부분을 일깨우는 열띤 강의를 이어갔다. ‘가위, 바위, 보’ 게임은 연달아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으므로 공평하게 보였다. 그러나 마을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 주먹을 펼 수가 없어 항상 주먹만 내는 자가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상대방이 보자기를 내어 늘 패배하던 그는 이러한 방식은 불공평하니 왼손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촌장은 규칙은 신성하기 때문에 오른 손으로 해야 한다고 묵살한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도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돼지 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외국인 노동자가 올해만 4명이 유독가스에 의해 사망한 이야기를 접하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저분하고 힘든 일을 대신하다가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슬픈 사건의 내면에 인권을 무시한 양돈주의 무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박진 강사의 강의에 몰입하다 보니 한국사회의 인권침해가 적지 않음을 실감하였다. 삼성전자 근로자의 백혈병 산업재해 사건, 구의역 청년 스크린도어 사건,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3000명해고 사건, 밀양송전탑 사건. 세월호 민간잠수사 2명 사망 사건, 군이나 직장에서 상사에 의한 성추행 자살 사건 등 우리가 좌시하는 오류에 기인하여 인권침해는 연일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는 것이다.” 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교육의 말미에 노르웨이 교도소의 실태를 영상으로 보고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죄인들이 생활하는 창살 없는 교도소가 시설 등 다방면에서 여느 호텔의 시설보다 더 좋았던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는 자아 존중감이 재범률을 낮추는 것일까? “인간다운 대접이 인간다운 생각을 만든다.”는 의미를 곱씹어 생각해 본다.

 

   강의의 말미에 주어진 질문시간에는 국가보안법 제7조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 촛불집회 현장에서의 문제점 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2시간여 진행된 강의를 진지하게 들으며, 인권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관점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인권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70억 인구가 다 다르게 생겼듯이 생각도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타인의 삶과 사상을 인정하는 것이 인권의 출발점이다.

 

오늘따라 인권이란 어휘가 긴 여운으로 내 마음에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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