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시장 답사기

-인권의 매몰(埋沒)-

 

연일 폭염(暴炎)이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대구는 어느새 대프리카라는 별칭을 얻었다.

열대야 현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문득 아프리카가 생각난다.

 

2010년 나는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동부아프리카에 위치한 탄자니아에 가기 위하여 비행기에 탑승했다. 평균고도 38.91피트, 560mph의 스피드로 7,307km9시간 20분 동안 날아 일단의 경유지인 두바이 공항에 착륙했다.

 

220번 게이트에서 45도 각도로 바라보니 두바이 사막에 세워진 세계 최고층 건축물인 부르즈 칼리파의 꼭대기에서 발산하는 불빛이 보였다. 저 건물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삼성물산에서 최첨단 기술로 시공한 높이 828m163층 구조의 자랑스러운 건물이다. 준공 한 지 몇 개월 경과하지 않은 그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조국의 우월성에 환호(歡呼)하였다.

 

우리들은 밤 11시경 다시 아랍에미레이트 항공기에 탑승하여 3,935km를 더 비행하여 현지시간 1520분에 검은 대륙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수도 다르살람에서 체류하여 현지 언어를 익히며 지내다가 한 달 후에는 내륙으로 3시간 정도 거리인 모르고로 시티로 이동하여 거소(居所)를 정한 다음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1시간 정도 달려 최종 목적지인 팡가웨 마을로 들어갔다.

 

코코넛 나무가 울창한 아름다운 그 마을에서 2011년까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흑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비록 가난하게는 살지만 소박하고 인정이 많은 마을 사람들과 금방 친하게 지냈고 의사소통도 나름대로 원활했다.

 

나는 장래의 소득증대가 목적인 녹화사업 일환으로 망고,아보카도, 오랜지 나무 등을 야산에 심었고, 독일 간호사 출신으로 봉사정신이 누구보다 투철한 간호사님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높은 산에 올라가 샘을 찾아 물탱크와 파이프 라인을 연결하여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물을 나르는 부녀자들이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도록 산 위에서 내려오는 자연 수압을 이용하여 산 아래 마을 초입에서 수도꼭지에서도 물이 나오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가끔은 청소년들에게 새마을 교육도 시키고, 간호사님의 간호사업도 도우며 그들을 살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했기에 입술이 찢어지고 발이 부릅 트고 피가 나도록 마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고동락 생활했다. 그들은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인권은 미약하였다.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사람도 많았다. 맨발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삼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가가호호 방문을 해 보았을 때, 에어컨 냉장고는 물론이거니와 선풍기 한 대도 없었다. 사실 그러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기장도 제대로 설치 할 수 없는 사정이니 모기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려 보건실을 찾아오는 아기들의 온도를 측정해 보면 무려 40도를 오르내렸다. 약을 구입 할 형편도 안 되니 그저 운명으로 받아드리는 길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등에 파묻혀 있는 고열의 아이들은 울지도 않았다. 다만 이를 악물고 있을 뿐...

 

어느 날, 녹화사업을 하던 산에서 한 흑인으로부터 노예사냥과 노예시장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살았던 시절의 비극적 실화로

동부에 위치한 잔지바르에 가면 노예시장이 있다고 했다. 나는 노예무역의 거점인 잔지바르에 꼭 한 번 가리라 마음먹었다.

 

동아프리카 내륙에서 서양인들의 소위 노예사냥으로 잡힌 노예들이 바다 건너 아랍과 미국으로 보내지기 전에 잔지바르 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노예시장에서 경매나 기타 거래로 마치 동물시장의 가축처럼 매매를 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드디어 2011613, 다르살람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의 심해를 1시간 반 정도 통과하여 인구의 약90%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잔지바르 섬에 입도했다. 옥색 바다와 우유 색 모래가 펼쳐진 풍광이 기가 막혔다.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100대 여행지에 선정된 잔지바르 섬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이 곳이 과거 노예시장의 거점 이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스톤타운에서 노예시장은 쉽게 접근 할 수 있었다. 노예시장 터의 뜰에는 비극의 역사를 대변 하듯이 조형물이 있었는데, 다섯 사람의 노예가 쇠사슬에 칭칭 묶여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쇠사슬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표정이 확연하게 보였다. 숙연한 마음으로 노예들을 바라보며 눈물이 쏟아 내릴 것 같은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인 체 한꺼번에 갇혀 있었다고 하니 대소변 문제와 냄새 등의 몰골이 상상만 해도 끔찍할 따름이다. 책자를 보니 16세기 포루투칼 침공 후에 오만 술탄의 통치아래 노예시장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현지인에 의하면 1873년 까지 오후 4시경에 시장판이 열렸고, 노예가 강하게 보여 보다 비싼 값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기름을 온 몸에 칠하기도 하며 악세사리 장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실제 노예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 있었던 장소에 들어 가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구토증세가 나고 화생방 가스실에 들어갔을 때 보다 더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참으로 음침하고 낮은 천장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만 사람 하나가 지나 갈 수가 있었다. 막장에 가니 마루로 보이는 공간이 양쪽에 있었는데, 이 곳에서 보통 한 달을 버티어야만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튼 날에는 잔지바르 바닷가로 나가 모험심이 발동하여 배 삯을 충분하게 지급하고 쪽배를 타고 노예섬으로 갔다. 물결이 센 바닷물을 아슬아슬하게 이동하여 20분을 더 가니 악명 높은 노예섬의 감옥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지금은 1m 길이의 바다거북이 백여 마리만이 사람들을 반겨 주고 옛날의 감옥은 그 비극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대로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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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감옥에서도 수많은 노예들이 회초리로 맞아 견디지 못하고 죽으면 바로 바다에 던져 버리는 악행이 인간에 의해서 저질러졌던 것이다. 안내인으로부터 참혹했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노예들의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무역의 주요한 축은 다름 아닌 인간 노예였다. 4백년 동안에 약 백만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잔지바르를 거쳐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19세기 가장 강력하게 잔지바르를 지배한 아랍계의 술탄이 바다에서 생선을 잡듯이 아프리카 각지에서 노예들을 사냥해 인도양 건너 다른 나라에 팔기 위해 쇠사슬을 줄줄이 엮어 생선 박스나 돼지우리 보다 통풍이 안 되는 쪽방 감옥에 보관 했다가 팔려 나간 노예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애달픈 역사를 지닌 탄자니아 사람들...!

착한 그들과 함께 웃고 울던 시간들이 세월이 흘러가니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슬픈 기억을 회상 할 때마다 마음은 한없이 아프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과 인격을 짓밟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인 일인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에도 한 때는 노예 매매가 성행하였고 조선조 26대 고종 31(1894)에야 비로소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노예전적의 폐기와 노예매매를 금지하게 되었지 아니한가?

 

나는 노예시장과 노예섬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과거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도 지금부터 라도 인권에 관한 일이라면 자신이 미약하고 부족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비록 작은 일이라도 관심을 갖기로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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