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기 인권기자 손승호

 

                  

        ▲ 6.25 전쟁 제66주년 기념식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이 발발한지 66년이 된다. 나는 오전 10시 대구 동구청 강당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여 홍안의 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영령(英靈)께 머리 숙여 명복을 빌고 미망인을 비롯한 남은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묵념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반월당 지하철역 만남의 장소에서 전시된 사진전을 살펴보고 그날의 참화를 상기하였다.

 

                        

              ▲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반월당 ‘만남의 장소’에 전시된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핵무장과 미사일 발사로 자유세계를 위협하며 날이 갈수록 전쟁의 공포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만약에 북괴군이 남침을 해 온다면, 선조들이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온 이 강산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왜냐하면, 국민안전처가 최근에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전국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과 대학생 1,000명을 표본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물의 한 단면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해외 체류 시 성인 40.9%, 대학생 19.9%만이 ‘최대한 빨리 귀국해 참전하겠다.’고 답했다. 또 전쟁 상황에서 성인은 국가가 우선이라고 답한 반면, 대학생은 ‘국가 보다 개인이나 가정이 우선’이라고 응답했다.

   

 

우리나라는 당시의 가난한 환경에서 풍요로운 세상으로 변모되었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유공자나 그 유가족에게 훈공에 상당한 보답을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 책무라고 해도 틀리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6.25에 기인하여 비참하게 살아 온 음지의 일부 사람들은 국가가 원망스럽다. 마땅히 보훈 받아야 할 유가족이 국가로부터 외면 받아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여 아무런 보훈도 없이 살아가는 소수의 미망인과 유가족들에게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경주에 살았던 A씨는 6.25 전쟁 때 40대초의 나이로 안강전투에서 보급 노무자로 차출되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지개로 보급품을 지고 고지로 다시 능선으로 이동하며 참여하였다.

   

 

그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평생을 불우하게 보내시고 유명을 달리하셨다. 단 한 차례도 국가보훈을 거론한 적은 없었다. 함께 참여했던 같은 마을의 사람들도 세월이 흘러 모두 별세하고 마지막 증인인 미망인도 슬픈 기억을 간직한 채, 수년전 세상을 하직하였다. 따라서 모든 청구권이 소멸 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사례이다. 대구 대명동에 사는 김삼록씨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에서 자원하여 입대하여 수송보급부대에서 근무하였다. 트럭에 보급품을 적재하여 전방으로 이동 중 폭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이듬해 가을 의병제대(육본특을546호)하였다.

   

 

전쟁 중 공상으로 특별상이기장을 수여 받았음에도 아무런 보훈도 입지 못하였다. 병환으로 오랜 세월을 고생하시다가 1974년 11월 파상풍으로 작고하셨다. 그 고통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생전에 보훈 청구를 하려고 하면 할아버지의 호통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사내대장부가 국가를 위해 전선에 나가 다친 것을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못난 짓이다.”라고 꾸짖으며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고 한다. 급기야 참척(慘慽)의 비통함을 당하자 모든 유품을 불태워 흔적을 지워 버렸다. 올곧은 애국심은 아들의 보훈도 묻어 버린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성장하여 연로하신 모친을 위해서 보훈처에 수차례 사실의 확인을 요청하였으나 ‘일부인정 흉부’라고 하면서도 ‘해당없음’ 처분을 반복하는 것이 야속하기만 하다.

   

 

야전병원의 치료 기록마저 “잘 모르겠다.”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부친의 공훈이 부친의 군번 바로 앞의 다른 사람인 모하사관에게 착오 수여된 강한 의혹도 있으나 폐쇄적인 군의 특성상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모친께서 생존할 때 보훈을 인정받아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은 것이 간절한 희망이다. 미망인이 사망하면 청구권이 소멸되어 모든 것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고 만다.

   

 

현재 생존하신 당숙부나 모친은 그 당시의 비참했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증인이다. 하지만 그 때는 솔직히 무지해서 신청을 못했고 지금은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우니 갑갑한 마음 헤아릴 수가 없다.

   

 

이제는 국가에서 더 이상 억울한 국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열린 자세로 전환하여 아직도 6.25전쟁의 이면에 서서 보훈 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간직한 사람들을 검증하여 인권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대구인권사무소 등 관련 기관에서도 상담을 통하여 그들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한 노신사가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의 손에는 “연평해전의 영웅 박동혁 병장 보상금 3,100만원”이라는 기사를 들고 있었다. 영화 “연평해전”을 보고 댁으로 가시는 길이신지는 몰라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그 보상금이 수학여행가다 죽은 학생보다 월등하게 적은 3억도 아닌 3천만원이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나라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신 모든 분들에게 합당한 예우와 보훈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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