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名) 재상


유성룡에 얽힌 전설같은 이야기..

유성룡(柳成龍)에게는 바보 숙부(痴叔•치숙)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콩과 보리를 가려 볼 줄 모를정도로 바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숙부가 柳成龍에게 바둑을 한 판 두자고 했다.


柳成龍은 실제로 당대 조선의 국수(國手)라

 

할만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아버지 항렬되는 사람의 말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두었는데 막상 바둑이 시작되자


유성룡은 바보 숙부에게 초반부터 몰리기 시작하여


한쪽 귀를 겨우 살렸을 뿐 나머지는 몰살 당하는


참패를 했다.

 


 

바보 숙부는 대승을 거둔 뒤 껄껄 웃으며


"그래도 재주가 대단하네. 조선 팔도가 다 짓밟히지는 않으니 다시

 

 일으킬 수 있겠구나." 라고 말했다.

이에 柳成龍은 숙부가 거짓 바보 행세를 해 왔을 뿐,


異人(이인)이라는 것을 알고 의관을 정제하고 절을 올리고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그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부는 아무날 한 중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할 것인데,


재우지 말고 자기한테로 보내라고 했다.


실제 그날, 한 중이 와 재워주기를 청하자


柳成龍은 그를 숙부에게 보냈는데


숙부는 중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네 본색을 말하라고 해


그가 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치러 나오기 전에

 

柳成龍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이라는 자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柳成龍은 죽음을 모면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의 자리에서


사실상 국난을 극복하는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부르던


그, 異人(이인)이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안팎의 사정이 모두 그렇다.


밖으로는 북한이 핵폭탄을 들고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불안요소도 그 못지않게 위험한것 같다.


 

 

 

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 

 
‘妖氣(요기)’라고 부르고 싶다.


약 15년 전부터 천박하고 경망한 기운이 일더니


그것이 점점 더 커져서 이제


妖邪(요사)스러운 기운이 되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사(國事)를 그릇되게 하고


있어 나라가 여간 어려움에 처해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 어느 때 못지 않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문교부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석학


황산덕 선생의 명저 <복귀>에


한민족은 절대로 절멸(絶滅)하지 않는다고 하고, 

 
그 이유를 임진왜란을 예로 들면서


이 나라는 위기를 맞으면 큰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나왔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이

 


 

그런 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면 그 말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난을 전후하여 장수로는 이순신, 권율이 있었고,


정치인으로는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이 있었으며


종교 지도자로는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조선오백년을 통틀어


몇 사람 나올까 말까 하는 큰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지금은 이 나라가 위기에


처한것이 분명한데,사실은 위기가 아니라는 말인지, 어째서

 

그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가 의문이다.


 

 

 

또 위에서 이야기한 그, < 계서야담>에 나오는


치숙(痴叔)과 같은 이인(異人)은


왜 볼 수 없는 것인가,


지금이 위기의 시대인 것은 맞고,


그러한 위기에 나라를 구할 뛰어난 인물들도,


옛 이야기 속의 그 이인(異人)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큰 인물이요,


異人인 것이다.


그러니까 불을 켜 들고 골목을 누비며


어떤 구세(救世)의 인물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투표를 바로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요, 사명대사요,


유성룡 대감을, 조선을 구한 異人,


치숙(痴叔)인 것이다.



가뭄으로 물은 부족해도 현세가

 

태평성세라는 고관대작들일진데

 

님의 따뜻한 마음은 온누리에


번지소서


처음 만남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인연이고

그 다음 만남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인연 이라 합니다.

 

[출처] 대한신보 -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6&wr_id=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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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광조' 어머니의 교훈
(이조 중종시)
정암 조광조는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남곤이라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냈다.
둘은 누가 공부를 더 잘하는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뛰어나고 우정 또한 깊었다. 
남곤이 조광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둘은 격의없이 친구처럼 지냈다.

어느 날 두 친구는
산으로 놀러 가게 됐다.
길에는 그들처럼 놀러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쁜 여자들도 많았다.
조광조는 마음을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 처녀들에게 관심이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데 친구인 남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기만 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조광조는 어머니께 돌아와서 자신의 수양이 덜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여성 앞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얘야, 어서 짐을 꾸려라. 우리는 오늘 밤에 아무도 모르게 이사를 해야겠구나.”

조광조는 영문을 몰라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하느니라.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이의 심정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목석이지.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있느니라. 나는 너 때문에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남곤과 사귀지 않도록 급히 이사를 가는 것이다.”

그래도 조광조는 어머니께서 왜 그리 수양이 많이 된 친구와 절교를 하게 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남곤은 목석같은 사람이고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으며, 냉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면 수양이 있어 보이지만 속으론 자기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참는다는 것이 너희 나이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없는 무서운 정치를 할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윗사람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야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데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너를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느냐?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다.
여기서 살면 안 만날 수 없고, 그렇다고 남곤에게 네가 무서워서 떠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부랴부랴 떠나는 것이다.”

조광조는 어머니의 판단에 놀랬다.

“어머니, 그래도 그 친구는 큰일을 하여 나라의 기둥이 될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나 지금은 너하고 같이 지내게 할 수는 없다.”

먼 훗날 조광조는 대사헌(현재의 검찰총장)이 되어 바른 정치를 펴나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38세에 큰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이때 조광조를 해친 사람은 다름 아닌 남곤이었다.
친구란 무엇인가?

       ㅡ 옮긴 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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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길을 나서다가 큰 들판에서 미쳐 날뛰는 큰 코끼리를 만났다. 그는 놀라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도망치다가 옛 우물터의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우물 밑에는 독사와 독룡이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위에는 미친 코끼리가 발을 둥둥 구르고 밑에는 용과 뱀이 혀를 낼름 거리니 나그네는 유일한 생명줄인 등나무 덩쿨에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 때 흰쥐와 검은쥐가 나타나서 서로 번갈아 등나무 줄기를 갉기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 볼 뿐인데 그때 머리위 나무가지에는 몇마리 꿀벌들이 집을 짓느라고 움직이는데 그때마다 꿀이 떨어져 입에 들어왔다. 그는 꿀의 단맛에 취해 모든 위험을 잊고 도취되었다. 그러는 동안 대지에는 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넓은 광야는 무명장야, 위험을 만난 사람은 인생, 코끼리는 무상, 옛우물은 생사, 등나무 줄기는 생명줄, 흰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 뱀과 독룡은 죽음, 벌은 헛된 생각, 꿀은 오욕, 불은 늙고 병듦을 비유한다고 한다.

-빈두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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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이탈리아에 한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민이 되는 상황마다 동전 던지기를 하는 것이었다.

한 때 그에겐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파리의 적십자사로 전근을 가느냐, 어느 디자이너 가게에서 일하느냐" 그는 앞면이 나오면 디자이너 샵으로, 뒷면이 나오면 적십자사로 전근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결과는 앞면이 나와 디자이너 샵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패션계에 발을 들이게 된 그는 곧 재능을 인정받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디오르(Dior)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디올이 죽고 후계자로 지명된 그는 또 다시 동전을 던진다. 회사에 남아 디올의 뒤를 이을 것인가 아니면 독립하여 내 이름으로 가게를 낼 것인가? 결국, 독립을 택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만들었고, 우리는 지금 그 브랜드를 "피에르 가르뎅" 이라 부른다.

한 기자가 그에게 말했다. "운이 정말 좋으시네요. 동전을 던져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그는 말했다. "동전 던지기가 좋은 선택을 하도록 한 게 아닙니다. 어떤 선택이든 일단 결정한 후엔 믿음을 갖고 밀고 나간 것 뿐 이니까요."

살아가며 마주하는 많은 선택 앞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무엇이 더 옳은 선택인지를 알기 위해서...,  혹은 나보다 앞선 사람들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들어보기도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선택‘ 그 자체가 아닌 선택 후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다.

운명은 우연이 아닌 선택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이다.  
 
-‘책 읽은 남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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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철종때 경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냥 '서선달'이라고 불렀다.

원래 선달이란 과거 시험에 급제는 했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만, 이 사람은 무슨 급제와는 관련이 없었고 그냥 사람이  심성이 착하고 무던해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서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인가는 봄이 왔어도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로 곤궁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그는 부산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효자 아들은 주인께 통사정을 하여 6개월치 월급을 가불받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서선달은 1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양반이 이 돈꾸러미를 발견했는데 세어보니 백냥이나되는 큰돈이
었습니다. 

한편 서선달은 30리는 더 가서야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이 돈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횡재라고 좋아하는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
  
''잃은 사람은 반드시 찾아온다.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 !!"

그 노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시간이고 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과연 한참 후 서선달이 얼굴이 훍빛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주운돈을 서선달에게 돌려주자 서선달은 "어른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며 돈을 찿아준 은혜를 갚겠다며 사례를 하려 하는데~

그 사람은 "은혜랄게 뭐가 있소 당연한  일인데" 하고는 펄쩍뛰며 사양을 했습니다.

그는 주운 돈 100 냥을  서선달에게  전달을 해 준뒤 가던 길을 갔습니다.

서선달도 다시 집을 향해 갔고 이윽고  어느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마침 한 소년이 물에 빠졌는데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어 구해 줄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헤엄을 못치는 서선달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저소년을 구해내면 백냥을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이 뛰어들어 소년을 살려 냈습니다.

죽다 살아난 도령이 선달에게 말하기를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이 아니었으면 저는 수중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 집은 안동에서 제일 큰 부자인데 함께 가시면 
백냥을 갚아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서선달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는지라 같이 안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안동의 총각집은 과연 고래등 같은 부자집 이었습니다.

그때 소년의 부친이 득달같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친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 이었습니다.

"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 주시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제가 돈을 잃었다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

"겸손의 말씀 이십니다.
7대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동 권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답으로 돈 천냥을 나귀에 실어 서선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서선달이 사는 상주 고을을 찾아와 백섬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후에 조정에까지 알려져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은 모두 조정으로
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참 착하게 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착한 것이 오히려 바보처럼 여겨지는 안타까운 시대입니다.

하지만 "덕필유린"입니다...

덕이 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은 반드시 주위에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것이 바보같아 보이지만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지름길이라는것을  명심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한 말씀 더*

장수의 비결은
먹는것은 절반으로
걷는것은 두배로
웃는것은 세배로
사랑은 무한정으로
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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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대지(大地)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탄 펄벅(Pearl S. Buck, 1892~1973) 여사가 1960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가 慶州 방문 시 목격한 광경이다. 
 
해질 무렵, 지게에 볏단을 진 채 소달구지에도 볏단을 싣고 가던 농부를 보았다. 펄벅은 지게 짐을 소 달구지에 실어 버리면 힘들지 않고 소달구지에 타고 가면 더욱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 농부에게 물었다. 
 
"왜 소달구지를 타지 않고 힘들게 갑니까?" 
 
농부가 말했다. 
 
“에이! 어떻게 타고 갑니까. 저도 하루 종일 일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일했는데요. 그러니 짐도 나누어서 지고 가야지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펄벅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기록했다 
 
"서양의 농부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소달구지 위에 짐을 모두 싣고, 자신도 올라타 편하게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농부는 소의 짐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지게에 볏단 을 한 짐 지고 소와 함께 귀가하는 모습을 보며 짜릿한 마음의 전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늦가을 감이 달려있는 감나무를 보고는 “따기 힘들어 그냥 남긴 건가요?” 라고 물었다.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 둔 “까치밥” 이라는 설명에 펄 벅 여사는 감동했다. “내가 한국에서 가 본 어느 유적지나 왕릉보다도 이 감동의 현장을 목격한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고 자신한다”고 기록했다. 
 
감이나 대추를 따면서도 '까치밥'은 남겨 두는 마음, 기르는 소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 작은 배려를 몸으로 실천하던 곳이 우리나라였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사람은 한 뿌리임을 알았다. 그래서 봄철 씨앗을 뿌릴 때도 셋을 뿌렸다. 하나는 하늘(새)에게, 하나는 땅(벌레)에게, 나머지 하나는 나에게, 서로 나눠 먹는다는 뜻이다. 
 
소가 힘들어 할까봐 짐을 덜어 주려는 배려, 이렇게 깊고 넓은 배려에 펄 벅 여사는 감동했었다. 
 
-‘내 서재에는 책이 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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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儒敎的) 법도에
충실했던 그에게
젊은한 여인을 향한 애정 한 편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소개(紹介)
합니다. 
 
퇴계 이황(李滉)은
48歲때 경치 좋은 단양(丹陽) 군수(守)로
부임(赴任) 했는데,
그 고을 관기였던 18세의 어린 두향을 만난다.  
 
두향은 첫 눈에
대나무처럼 올곧은
퇴계를 연모하게 되었고, 
 
퇴계도 부인과 아들을
잇따라 잃었던 터라
공허한 가슴에
두향이 들어왔다.  
 
30년
세월(歲月)을 뛰어넘는
사랑의 교감(交感)이고,
반상(班常)의
신분(身分)을 뛰어넘는
로맨스다.  
 
두향은 詩(시)와 書(서)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매화(梅花)를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퇴계의 곁에서
거문고(금:琴)를 타며
퇴계(退溪)의 얼굴에서
미소(微笑)가 떠나지 않게 한 여인(女人)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시작한지 꼭 9개월 만에
퇴계가 경상도 풍기(豐基) 군수로 전근 발령(發令)을 받는다.  
 
두 사람 모두에게
대단한 충격(擊)이었고,  
 
관기(官妓)를 못 데리고
다니는 당시의 규율(規律)때문에 결국(結局)
두향을 두고 퇴계는 혼자 풍기로 떠나야만 했다.  
 
떠나면서 꾸린 짐 속에는
두향이 준 수석2개와
매화 화분(花盆) 한 개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에
마주 앉아 주고 받았던
한시(漢詩)가 백미다.  
 
"死別己呑聲
(사별기탄성)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生別常惻測
(생별상측측)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그리고
퇴계는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期約)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詩 (시)한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우는데,
어느덧 술도  비워 없어지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離別)은
결국(結局)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져  
 
퇴계가 70세로
세상(世上)을 하직
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퇴계(退溪)가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조(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승장구(乘勝長驅)
하는데~ 
 
아마도
두향은 누가 될까하여
퇴계에 대한
두향의 배려였으리라.  
 
퇴계와 이별(離別) 한 후
두향은 관기(官妓)를 그만두고 퇴계와 즐겨갔던 남한강(南漢江) 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平生)을 살았다.  
 
이별 후 이들은 만나지 못하고 서로 서신(書信)만 주고받았다.  
 
다음은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시다.  
 
"黃卷中間對聖賢
(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속에
좋은 말씀을 보면서  
 
虛明一室坐超然
(허명일실좌초연)
빈 방에 홀로
조용히 앉았는데  
 
梅窓又見春消息
(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
(막향요금탄절현)
그대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고 한탄 말라  
 
퇴계는 말년(末年)에
안동(安東)에 있는
도산(陶山) 서원(書院)
에서 조용하게 지냈는데  
 
한 때는
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 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다.  
 
그 경황에서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불결(不潔)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 매화(梅花)가 바로 두향이 준 것 이여서
각별(各別)히
애지중지(愛之重之)
하였다  
 
명종과 선조 임금이
항상 퇴계에게
큰 벼슬을 내리면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출세(出世)보다는
학문에 전력했던
군자(君子)였다.  
 
그러나
詩(시)와 음악(音樂)과
한 女人(여인)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였고,  
 
또 달과
山(산)과 江(강)과 梅花(매화)를
유달리 사랑했던
풍류객(風流客)이었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가 병이 깊어
누워 있던 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제자들이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윗목에는
매화 화분 하나가
두세 송이 부푼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데,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승을 하직 했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70세 였다.  
 
그날은 맑았는데
오후 다섯시쯤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고
조금 뒤
선생이 숨을 거두시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도 그쳤다.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를 이어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다.  
 
어느 날 두향이
안동의 퇴계에게
난초를 보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井花水)로
소중히 다루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먼
도산서원 까지 4일간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퇴계 선생의
파격적인 사랑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 애달픈 사랑을
잊지는 않는 다는 것이
사람의 禮(예)인 모양이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女子(여자)는 존경(尊敬)하는
님에게는 ••• 
 
변치않는
숭고(崇高)한 사랑으로
승화(昇華)시키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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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유명한 심리학자 
브레이저 박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한테 10억원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도 남들처럼 
공부는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잘사는 부자와 결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남보다 잘 생긴
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주로 
“내가 ㅇ ㅇ ㅇ 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가정형 질문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브레이저 박사는 
그들에게
“나는 ~ 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문장을 매일 4 개씩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부러워하는 타인을 
떠올리며 불평하던 
때와는 달리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문장을 완성했다.  
 
“나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나는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어
정말 다행이야” 
“나는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브레이저 박사에게
이 훈련을 받고 난
6개월 뒤에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합니까?”
라고 물었다.
"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참 다행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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