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노력] 
 
고대 중국 당나라 때 활동한 이후 동서양의 모든 문인이 칭송하는 천재 시인 이태백, 그런 그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에 절망하고 붓을 꺾고
유랑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필을 선언하고 자신과 세상을 비웃으며 유랑하던 어느 날, 산 중턱에 있는 한 노인의 오두막에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과묵한 노인과 저녁을 먹은 이태백이 잠자리에 들려는데 노인은 커다란 쇠절구를 꺼내더니 숫돌에 갈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이태백이 물었습니다. 
 
"어르신, 왜 그 커다란 쇠절구를 숫돌에 갈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바늘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태백은 노인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 쇠절구가 바늘이 될 때까지 갈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에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묵묵히 쇠절구를 갈았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없이 고고한 모습으로 집중하면서 쇠절구를 가는 노인의 모습에 흠뻑 빠져들어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태백은 깨달았습니다. 
 
하나의 재능이 있다 해도 아홉의 노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렇게 노력의 중요함을 깨달은 이태백은 역사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책 읽은 남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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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僥倖)히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이규보)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唯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게 인생의 한이다)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지식(智識)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막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 집(이규보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科擧)에 낙방(落榜)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오고해서 면담(面談)을 신청(申請)했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사흘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백로(白鷺)를 심판(審判) 으로 하여 노래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 시합을 제의 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試合)에 응(應)했다. 그리고 3일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한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白鷺)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백로(白鷺)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 되어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라는 글을 대문 앞에 붙혀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不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比喩)해서 한 말이었다. 
 
와(蛙, 개구리 와)
이(利, 이로울 이)
로(鷺, 백로 로) 
 
이규보(李奎報)선생 자신(自身)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實力)이나 지식(智識)은 어디에 내놔도 안떨어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정승(政丞)의 자식(子息)이 아니라는 이유(理由)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白鷺)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에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李奎報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自身)도 과거(科擧)에 여러 번 낙방(落榜)하고 전국(全國)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 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宮闕)에 돌아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命)하였다고 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날, 이규보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準備)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 걸은 시제(詩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 이란 여덟 글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의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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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리홍조 雪ㅅ泥鴻爪 > 
 
중년의 나이를 넘으면 존경을 받지 못할지언정 욕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소동파의 시에 설니홍조 (雪泥鴻爪)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러기가 눈밭에 남기는 선명한 발자국'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자취는 눈이 녹으면 없어지고 맙니다.

인생의 흔적도 이런게 아닐까요?
언젠가는 기억이나 역사에서 사라지는 덧없는 여로...

뜻있는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지내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中國 故事에
강산이개 (江山易改)
본성난개 (本性難改)
라는 문장이 있는데,  
 
'강산은 바꾸기 쉽지만,
본성은 고치기 힘든 것 같다'
는 뜻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본성이 잇몸처럼 부드러워져야 하는데 송곳처럼 뾰족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하고 일갈했을 때, 그의 친구들이 그럼, "당신은 자신을 아느냐?" 라고 되물었답니다.  
 
그 때 소크라테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본성을 고치는 첩경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사람은 다섯 가지를 잘 먹어야 한다고 써 있었습니다.  
 
1,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
2, 물을 잘 먹어야 한다.
3, 공기를 잘 먹어야 한다.
4, 마음을 잘 먹어야 한다.
5, 나이를 잘 먹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의 비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존경받는 삶의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년의 나이를 넘어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기보다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존경을 받지 못 할 지언정 욕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삽니다.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스무 살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 라는 명언을 남겨습니다 
 
중년 이후의 얼굴은 그 사람 인생에 대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므로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큰 업적 이나 칭찬받기 보다는 지탄 받거나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는 인생이 더 위대한 삶이 이닐까 생각합니다. 
 
이어서 '사향노루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느 숲속에서 살던 사향노루가 코끝으로 와 닿는 은은한 향기를 느꼈습니다. 
 
"이 은은한 향기의 정체는 뭘까?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된 향기인지 꼭 찾고 말거야." 
 
그러던 어느 날, 사향노루는 마침내 그 향기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험준한 산 고개를 넘고 비바람이 몰아처도
사향노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을 다 헤매도 그 향기의 정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향기를 느끼며 어쩌면 저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향기가 시작되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향노루는그 길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쪽 발을 헛딛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향노루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향노루가 쓰러져 누운 그 자리엔, 오래도록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향기의 정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던 사향노루. 
 
슬프고도 안타까운 사연은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나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더 먼 곳, 더 새로운 곳.
또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행복과 사랑,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들이야 말로 끝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한 사향노루가 아닐까요? 
 
우리는 최고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들이지만 그저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넉넉한 하루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나 자신을 믿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 펌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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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는 1347년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 포위되었습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더 이상 먹을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리를 거두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말했다. "칼레의 시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겠다!" 칼레 시는 영국 왕에게 사절을 보내 여러 번에 걸쳐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좋다. 그러면 시민들의 목숨은 보장 하마.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영국군을 애먹인 대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영국 왕은 시민 대표 6명을 뽑아 보내면 그들을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으며, 대신 다른 시민들은 살려주겠다며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 한다니.. 누군가는 나서야 했지만, 아무도 목숨을 버리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죽음을 자처했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이여,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그러자 시장도 나섰습니다. 상인도 나섰고, 그의 아들도 나섰습니다. 죽음을 자처한 사람이 모두 일곱 명이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지요.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 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제의했습니다.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는 건 어떻습니까?" 모두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이른 아침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습니다. 모두 안 나와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습니다. 목숨을 건 용기가 적의 수장까지 감복시킨 것입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에게 의뢰했는데 이 작품이 <칼레의 시민들>입니다. 
 
-SNS커뮤니티 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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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에 이당은 광주고을 관아의 아전 출신으로 원님의 딸과 결혼했던 신분이 기록에 남아있어서 광주 이씨의 중시조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이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5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이당의 아들 이집에게는 최원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영천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자 개성으로 올라와 이집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이집과 최원도는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둘사이의 우정은 아주 돈독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공민왕이 개혁을 위해서 등용한 요승 신돈이 절대 권력을 휘드르자
점차 타락하여 세상이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최원도는 공민왕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는데 여러번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그 꼴을 참지 못하고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낙향을 해버렸습니다. 
 
이집도 벼슬을 버리고 대로의 벽면에 신돈을 비난하는 대자보도 붙였으며 군중들을 모아놓고 신돈을 신랄하게 성토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양의 변두리 지금의 둔촌동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일은 크게 벌어졌습니다. 당시 공민왕으로 부터 절대 권력을 위임받은
신돈의 무리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한양골을 수색하며 돌아다녔습니다.(둔골이다,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이 숨어살던 굴) 
 
이집은 자신이 숨어서 은둔하던 둔골마져 드러날 것이 분명해지자 급한 마음에 늙은 아버지(이당)을 등에 업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숨어지낼 곳이 없던 이집은 고민하다가
경상도 영천 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떠났습니다.  
 
몇 달 만에 최원도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침 그의 생일날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집은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면서 하인들에게 그가 왔음을 전했습니다. 
 
친구 최원도는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문간방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이집은 자신을 최원도가 반기는 줄 알고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데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 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이냐?"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매우 난처해하며,  
 
"여보게!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주게나~" 
 
그러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하인들을 시켜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 사랑채를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생일잔치에 모였던 사람들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칫하면 멸문의 화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은 이해되면서 평소에 신의가 확실하던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가서
덤불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이집이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두워지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면서 조용히 불렀습니다. 
 
"친구 어디에 있는가? 나는 원도일세~!"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4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에 이집을 잡아 죽이려는 신돈의 무리들이
이집의 친구 최원도가 살고있는 영천고을에 들이 닥쳤는데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 이집을 내치는 것과 역적이 앉았던 사랑채를 불태웠던 장면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 등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락방 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과 부인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가져온 밥상은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낮이면 다락에 숨어 지내다 밤이 되면 한 이불을 덮고 세 사람이 함께 잤습니다. 그런데 최원도의 집에 연아((燕娥=제비연/예쁠아)라는 얼굴도 이름도 예쁜 19살 계집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친구의 부자(父子)라고 생각지 못하고
첩이라도 둔 걸로 생각하고,
“벽장 속에 사람이 있으시면 말씀을 하실 것이지 숨겨 놓으십니까?”라고 하자,  
 
최원도는 친구 부자가 숨은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여 큰 일이라 생각하여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습니다. 
 
한편 연아는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몇 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고 비밀을 지켰습니다. 
 
최원도 부부는 몸종 연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연아를 뒷산에 묻어 주었습니다. 
 
다락방에 은거생활이 1년이 채 되기 전에 이집의 아버지(이당)가 별세했습니다.  
 
이집의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던 최원도는 장례를 준비하고 슬퍼함에 있어서도 친부모와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최원도는 자신이 사용하려던 수의를 이당의 시신에 입히고 자신의 선영에 모셨던 모친의 옆에 이당을 모셨습니다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있습니다. 
 
한편 부패한 신돈이 대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정에서는 최원도와 이집을 중용하고자
여러차례 불렀으나 두 친구는 벼슬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길을 택해서 조용히 학문을 닦으면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집은 경기도 여주로 내려와 이포 강가에서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김구용 등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그리고 신돈의 세력을 피해서 이집 선생이 잠시 머물렀던 둔골은 오늘날 서울 둔촌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세월은 흐르고 흘렀지만 양쪽 가문의 우정은 이어졌습니다. 이집의 후손들이 산 밑에 보은당(報恩堂)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최원도의 은혜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에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은 선조를 도왔던 최원도 선생께 감사하면서
경상도 도체찰사로 재임시에 위토를 마련하여 두 어르신의 제사를 같은 날 지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월 10일이 되면 영천의 나현(蘿峴)에서는 양가가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면서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합니다. 
 
이당의 묘지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연아(燕娥)의 묘와 묘비가 세웠졌고, 양쪽 집안 조상의 묘제 때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자결한  연아의 무덤인 ‘연아총(燕娥塚)’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이죠?
멸문지화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지켜가는 인간의 도리,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세태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참다운 도리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전설같은 실화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우정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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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제(濟)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안영이 제나라 왕 경공을  모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지기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부주의로 왕이 사냥한 사냥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 자리에서 사냥지기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같이 사냥을 나갔던 주변의 신하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때 안영은 경공에게 직접 충고하지 않고 우회하는 전술인 "우직지계(迂直之計)"를 선택하였습니다. 곧장 가는 것보다 우회하는 것이 효과적이란 "손자병법"에 나오는 계책입니다. 안영은 사냥지기를 끌고 나오라고 해서 그에게 큰 소리로 세 가지 죄목으로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세 가지 죄를 범했다. 첫째, 너의 맡은 바 임무인 군주의 사냥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군주로 하여금 한낱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했으니 부덕한 군주로 만든 것이다. 나아가 우리 군주가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한낱 사냥감 때문에 사람을 죽인 군주라고 비난받게 만드는 것이 너의 세 번째 죄다. 네가 이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안영이 사냥지기를 추궁하는 말 속에는 우회하여 군주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사냥지기를 죽이면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냥감 때문에 분노가 지나쳐서 사람을 죽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냥지기를 놓아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안영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자신의 주군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곧장 가는 직설화법 보다는 돌려서 말하는 우회화법이 더욱 지혜로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유난히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목소리가 부드러운 탓도 있지만 직설적이 아니라 우회적인 표현으로 본인의 의사전달은 물론 효과도 거둡니다. 
 
물론 본인의 부단한 노력과 지적인 자산이 풍부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화법을 가르켜 "담언미중(談言微中)"이라고 합니다. "완곡한 말로 정곡을 찌름이라는 뜻"입니다.  
 
진(秦)나라에 우스운 이야기를 잘하는 우전(優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는 아주 작았지만 그가 하는 우스운 말 가운데에는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도리가 들어 있었으므로 진시황도 그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진시황은 황제의 수렵림을 넓혀 동쪽으로는 함곡관(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동북쪽)에서 서쪽으로는 옹(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동쪽)까지 넓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우전이 간언합니다. 
 
"좋습니다. 그곳에다 많은 짐승을 기르다가 적군들이 동쪽으로 침범해 오면 사슴들로 하여금 뿔로서 적을 막아내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 자신의 계획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즉시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전의 우회화법이 진시황의 잘못된 계획을 수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물을 유리컵에 담으면 마시는 물이 되고, 세숫대야에 담으면 씻는 물이 됩니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에서는 말투가 그릇의 역할을 합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어투가 퉁명스럽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지면 본연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듣는 사람은 마음이 상하거나 괜한 오해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말투란 사전적 의미로 "말을 하는 버릇이나 본새"를 의미합니다. 대화를 하면서 왠지 모르게 호감이 생기거나 신뢰가 가는 사람은 말투가 좋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성격이 나쁠 것 같다거나 짜증을 잘 낼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말투가 안 좋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투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보니 자신의 말투가 어떤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말투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경쟁력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고사성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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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자식, 천자(통치자)와백성은
천륜으로 죄업을 짓으면 천부 하늘에 죄를 짓는 것으로 빌고 용서 받을 곳이 없다! 이것이 천죄요 천업보 인 것을 골백번 명심하고 죄업을 범하지 말 것을 기원합니다!
♤효성 깊은 며느리♤
옛날 충남 공주 땅 팔봉산 자락에 효심이 지극한 청상과부가 병든 시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본래 밭고랑 하나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다 그나마 시집온 지 삼 년 만에 
들일을 나갔던 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는 바람에 졸지에 죽고 기력 없는 시아버지만 떠안고 
말았다.

말 잘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과연 몇 해나 버틸 거냐고 허구한 날 수군거렸지만 
청상과부의 효성은 벌써 일곱 해를 하루같이 변할 줄 몰랐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은 변함없이 지극 정성이었으며 
봄이면 날품팔이, 여름이면 산나물과 약초를 캐다 팔아 힘든 생계를 이어갔다.

"아가야,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 
이제 좋은 상처 자리라도 만나 배나 곯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세상천지에 널 탓하고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병든 시아비는 틈만 나면 며느리의 손을 잡고 통사정을 하며 울었다.

"아버님, 제 집이 여기인데 왜 저를 자꾸만 내치시려 하십니까? 
저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살아도 이 집 며느리요, 죽어도 이 집 귀신인 제가 가기는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어서 몸이나 쾌차하십시오. 
아버님!”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이 돌아왔다. 
그나마 받은 품삯을 시아버지 약값으로 다 쓰고 보니 정작 차례를 지낼 일이 걱정이 되었다. 이틀 후면 한가위인데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빈상에 냉수만 올리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병든 시아버지의 낙심을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며느리는 방문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저 읍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며느리가 쪽마루를 내려서는데 시아버지는 그날따라 안간힘을 써가며 문구멍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립문을 나서는 며느리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시아비는 피를 토하며 울고 있었다.

며느리는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두 다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천근만근으로 무겁기만 했다. 
걷다 힘이 부치면 냇가 미루나무 아래서 쉬고 추수가 끝난 들녘에서 벼이삭을 주우며 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더없이 야속하기만 한 서방의 얼굴이 어른거려 쉴 새 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걷고 또 걷고,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새 해는 한나절이 지나고 서쪽 하늘이 봉선화 꽃잎을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큰 재를 넘으니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친정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버지, 어머니...” 

딸은 실로 몇 해만에 보았을 친정을 내려다보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리며 그토록 서럽게 울었다. 

얼마 후 딸은 친정 집 광속에서 제법 묵직한 자루하나를 들고 나와 미친 듯이 재를 넘고 있었다.

"되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딸은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오던 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뭄이 들었다지만 요행히도 친정 집은 아직까지 보릿가루며 보리기울이 넉넉한지라 이고 
갈 만큼은 퍼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곡식 자루를 이고 뒷동산을 넘고 있을 때 말없이 툇마루에 서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동산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어찌 이다지도 박복하더란 말이냐, 
오죽이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 한가위에 친정 울타리를 다 넘었겠느냐, 
아이고 불쌍한 내 딸아!” 

며느리는 새벽녘이 다 돼서야 온 몸이 땀에 절어 돌아왔다. 
그 머나먼 곳을 다녀왔지만 그녀는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하나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한가윗날 아침에 산나물 반찬에 밀가루 전을 부쳐 흰쌀밥을 올리고 조상은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서방님께 제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한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 며칠이 되면서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사립문 밖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 밖을 나가보니 서너 말이 됨직한 좁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 흉년에 누가 이 귀한 낱알을 두고 갔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갈만한 구석이 없었다.

아무리 궁색한 살림살이지만 남의 곡식을 덥석 축낼 수가 없어 며칠을 새벽잠을 설치며 전전 긍긍하는데, 어느 날 또다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던 터라 며느리는 죽을 힘을 다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사이, 등에 지게를 걸머진 남자가 번개같이 담을 돌아 논둑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보셔요, 잠시만 저를 보셔요"

어느새 남자의 등 뒤까지 따라간 며느리는 그만 낚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멋쩍은 듯 웃으며 돌아선 이는 다름 아닌 친정아버지였다.

"이것아 집에 왔으면 어미나 보고 갈 일이지. 
고구마다, 허기질 땐 꽤나 양식이 되고...
정 힘들면 대낮에 다녀가거라. 
네 어미에게는 아직 말을 안 했다!”

"아버지, 
절 보셨으면 왜 한 번 불러주지 않으셨어요!"

딸은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들어가거라,  어서.
동네사람 볼까 무섭다. 어서!"

돌아서는 아버지의 볼에서도 어느새 
하염없는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천륜으로  맺어지는 인연으로 만난다는데 불쌍한 자식을 보니 "부모또한" "자식또한"  어찌 이루 말을 다할수 있겠으랴!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니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

팔공산 정상에서 흘러가는 구름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서  우주법계의 진리를 찾아 허공을 향해 외쳐봅니다! ,,,,,,,,,,,,,,,,,,,,,,

팔공산도사   법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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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가치가 있는 글이라 보내드립니다 
 
친구가 몇이나 되오 
 
류진사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이다.  
 
한 평생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 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 쌓은 걸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같은 들판을
덮고도 남으리라. 
 
그러다보니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財産)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中農) 집안이 되었다.  
 
류진사(柳進士)는
덕(德)만 쌓은 것이 아니라
재(才)도 빼어났다.  
 
학문(學問)이 깊고,
붓을 잡고 휘갈기는
휘호(揮毫)는 천하(天下)
명필(名筆)이다.  
 
고을 사또(使道)도
조정(朝廷)으로 보내는
서찰(書札)을 쓸 때는
이방(吏房)을 보낼
정도였다.  
 
류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文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인(婦人)과
혼기(婚期)찬 두 딸은  
 
허구한 날
밥상,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하는 게
일과(日課)다.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虛法)
스님이 찾아왔다.  
 
잊을만하면
류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 스님을 류진사는
스승처럼 대한다.  
 
그날도
사랑방엔 문사들이
가득 차, 스님이 처마 끝
디딤돌에 앉아 기다리자,  
 
손님들이
눈치채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허법 스님과
류진사가 곡차상(穀茶床)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류진사는
친구(親舊)가 도대체
몇이나 되오?”  
 
스님이 묻자  
 
류진사는
천장을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  
 
“얼추 일흔은
넘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다.  
 
“진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오.”  
 
류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다.  
 
“스님,
한눈 가득 펼쳐진
저 들판을 모두 남의 손에
넘기고, 친구 일흔을
샀습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아야 셋, 그 이상이면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삼경(三更)이 지나
고꾸라졌다.  
 
류진사가
눈을 떴을 때
스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부터
류진사네 대문(大門)이
굳게 닫혔다.  
 
집안에서는
심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의원(醫員)만 들락거려, 
 
글 친구(親舊)들이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 가도
진사네 대문은
열릴 줄 몰랐다.  
 
그러더니
때아닌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밤에 곡(哭) 소리가
터졌다.  
 
진사가 지독(至毒)한
고뿔을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下直)한
것이다.  
 
빈소(殯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喪服)을 입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침통(沈痛)하게
빈소(殯所)를 지켰다.  
 
진사
생전(生前)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 친구들은
낯짝도 안 보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問喪)을 와
섧게섧게 곡을 하더니, 
 
진사 부인을
살짝이 불러냈다.  
 
“부인(夫人),
상중(喪中)에 이런 말을
꺼내 송구(悚懼)스럽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그 친구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미망인(未亡人)에게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借用證)이다.  
 
류진사가
돈 백냥을 빌리고
입동(入冬) 전에 갚겠다는
내용(內用)으로,  
 
진사의
낙관(落款)까지 찍혀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문상객(問喪客)은
왕희지(王羲之)  
 
족자(簇子)값 삼백냥을
못 받았다며
지불각서(支拂覺書)를
디밀었다.  
 
구일장을 치르는데,  
 
여드레째가 되니
이런 채권자(債權者)들이
빈소(殯所)를 가득 채웠다.  
 
“내 돈을 떼먹고선
출상(出喪)도 못해!”  
 
“이 사람이
빚도 안 갚고 저승으로
줄행랑을 치면 어떡해.”  
 
빈소(殯所)에
죽치고 앉아 다그치는
글 친구들 면면(面面)은
모두 낯익었다.  
 
그때 허법 스님이
목탁(木鐸)을 두드리며
빈소(殯所)에 들어섰다.  
 
 
미망인(未亡人)이
한 뭉치 쥐고 있는
빚 문서(文書)를
낚아챈 스님은 
 
병풍(倂風)을
향해 고함(高喊)쳤다.  
 
“류진사! 일어나서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던지고 산 
 
잘난 당신 글
친구들에게 빚이나
갚으시오~.”  
 
병풍(倂風) 뒤에서
‘삐거덕’ 관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류진사가 걸어 나왔다.  
 
빚쟁이 친구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해
신도 신지 않은 채
도망쳤다.  
 
류진사의
만류(挽留)에도
불구(不拘)하고  
 
허법 스님은
빚 문서 뭉치를 들고
사또에게 찾아갔다.  
 
이튿날부터
사또(使道)의
호출장(呼出壯)을 받은  
 
진사의
글 친구 빚쟁이들이
하나씩 벌벌 떨면서
동헌(東軒) 뜰에 섰다.  
 
“민초시(閔初試)는
류진사에게 삼백 냥을
빌려줬다지?”  
 
사또의 물음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린 민초시는
울다싶이 읍소했다.  
 
“나으리,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곤장
삼백 대를 맞을 텐가,  
 
삼백 냥을
부의금(賻儀金)으로
류진사 빈소에 낼 건가?”  
 
류진사는
글 친구들을 사느라
다 날린 재산(財産)을 
 
그 친구들을
버려서 다시 찾았다. 
 
 
"친구(親舊)란
온 세상(世上)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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