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 이런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 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1946년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에 현인이 부른 이 노래는 일제 시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야 했던 젊은이들의 슬픔과 한(恨)을 담은 노래로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노래였죠. 

고모령은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자그마한(?) 고개인데 이에 얽힌 두 가지 버젼의 전설이 있죠.

하나는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피는 시절의 전설이고, 하나는 거의 실화로 봐야겠죠.

먼저 전설의 고향으로 가볼까요.

옛날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죠. 

하루는 스님이 지나가다가 혼잣말로 한마디 했죠.

“이 집이 가난한 것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서다.”

이 말을 듣고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계속 산을 쌓았는데,

그 산봉우리가 바로 현재의 모봉, 형봉, 제봉 세 개의 산봉우리라고 하네요. 

그런데 그후 산을 쌓던 두 남매가 서로 높이 쌓으려고 시샘하여 싸우게 되고, 

이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에 집을 나와버렸죠. 

집 나온 어머니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길이고, 고개 정상에서 집을 뒤돌아 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해서 고모령(顧母嶺)이 되었다는 것이죠.
(顧 :돌아볼 고)

이번에는 실화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일제 강점기 때 고모역은 징병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집결지였고, 이들이 탄 열차는 반드시 고모령 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는데··

그 당시 증기기관차 성능으로는 높은 경사의 고모령을 한 번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고모령에서는 열차가 더디게 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 때 징병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로 그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네요.

바로 불후의 명곡 ‘비 내리는 고모령’의 탄생 계기가 된 것이죠.

1991년 수성구 의회에서 이곳에 노래비를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 이 노래비를 취재하다 열차를 피하지 못해 순직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문호(당시 29세)의 불망비도 함께 세워져 있죠.

참고로 1925년에 문을 연 고모역은 197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차역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화물차만 머무르는 간이역으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보슬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봄날이든,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여름날이든,

언제 기회가 되시는 회원님들은 이 고개를 걸어 넘어가 보면서 전설과 노래에 얽힌 어머니의 한(恨)과 애틋한 민족 정서를 느껴보는 것도 어떨지··

사람들의 추억 한켠에 자리하던 옛 서울역은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옛 남원역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옛 반야월역은 작은 도서관으로 재탄생하여  다시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철조망에 갖힌 고모역 또한 '비내리는 고모령'을 동기로 한 노래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바람을 가져보네요.

'비내리는 고모령'뿐만 아니라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베사메무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한국 대중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故현인 선생의 노래 박물관으로··

마지막으로 박해수 시인의 '고모역'이란 시 한 수 소개하고 마칠까요.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뒤돌아보면 옛 역은 스러지고
시레기 줄에 얽혀 살던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
아 바스라지고 부서진 옛 기억들
부엉새 소리만 녹슨다
논두렁 사라진
달빛 화물열차는 몸 무거워
달빛까지 함께 싣고
쉬어 가던 역이다

깊어가는 만추에 고즈녁한 고모령의 추억을 한번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지요.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성 깊은 며느리  (0) 2020.11.07
류진사 이야기  (0) 2020.10.26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  (0) 2020.09.29
[못난 사람과 겸손한 사람]  (0) 2020.09.27
★모파상의 묘비명  (0) 2020.08.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