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언덕을 넘어...

 

조용히 눈을 감는다.

조기전역 후의 참혹했던 인생의 한 단면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차디찬 쓴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그 때는 허허벌판에 추락한 다리 없는 달팽이 신세 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전혀 몰랐다.

 

필력이 둔하여 굴곡진 한 인생의 단면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본인이 체험한 지나간 일들을 진솔하게 반추(反芻)해 보고자 한다.

 

마치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절망은 어느 순간 희망으로 변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 했다. 전역 2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렴풋이 깨달았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에 있을까?”라는 시인의 글귀처럼 바람이 불어 나무 가지를 흔들어야만 뿌리의 물이 공급되어 알찬 열매가 열린다는 평범한 사실을 사람들은 흔히 간과(看過)한다.

자신도 같았다.

 

1990 7 무더운 여름 어느 , 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계급정연으로 푸른 군복을 벗었다.

막상 전역신고를 하고 부대정문을 나서는 순간 솔직히 뜨거운 눈물이 발끝까지 흘러 내렸다.

억울했다.

참으로 어중간한 15 복무의 갑작스런 이직은 암담함 자체였다.

 

아내와 아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뿐만이 아니다. 부가하여 연노하시고 병마에 시달리시는  부모님을 봉양할 책임도 메여져 있었다.

막막했던 때의 심정을 아마도 평생 잊을 없을 같다.

 

 

그날  저녁노을이 지는 금호강 둔치에서 조약돌을 밟으며 말없이 걸었다.

소화불량으로 밥을 먹을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스스로 매질을 가하고 있었다.

“넌 패배자다. 아니 낙오자야!”직설을 부으며 가혹하게 학대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깨는 늘어지고 오직 절망의 아픈 상처가 요리조리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로등 불빛을 올려 쳐다 보았다.

수많은 하루살이 벌레가 원을 그리며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스르르 주먹을 쥐었다.

 

하찮은 미물도 불빛을 찾아 저렇게 힘차게 날고 있는데 하물며 사나이 대장부가 이런 일로 의기소침해 불행의 나락으로 스스로를  함몰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부터 철두철미하게 살자. 어느 누구도 인생을 대신 사람은 없다. 죽더라도 날아나 보고 죽자. 다짐하고 다짐했다.

 

절체절명(絶體絶命) 순간에 작은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그것을 바로 행동에 옮겨 희망의 나무를 심는 계기를 만들었던 셈이다.

 

인내하고 노력하는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나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있어야 된다고 판단하여 잠재능력 배양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전역한 바로 ,  경북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경영학을 배웠다. 자영을 하더라도 기본을 알고 접근 하려는 심산이었다.

 

 

우선 아내와 의논하여 효신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문구점을 열고 보다 일찍 이어나 새벽부터 준비를 하여 등교시간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판매활동을 다음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대구 중구청에 위치한 바르게살기운동 중구협의회 사무실로 출근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퇴근 때는 도매점이 모여 있는 칠성시장에 오토바이로 이동하여 백미러가 가릴 정도로 짐을 가득 싣고 점포로 가서 일했다. 다음은 오토바이로 골목길을 재빠르게 이동하여 대학교 공터에 주차하여 핼멧을 벗고는 강의실로 달렸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기동력으로 점포로 이동하여 밤이 늦도록 녹초가 되도록 일했다.

 

당시를 회상하면 비록 몸은 지치고 피로하였지만 수입도 짭짤하였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이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으로 생활한 2 지난 시점에 시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포가 활성화 되자 임대인은 과도한 임대료를 요구 했다. 주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점포를 인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회초년생으로 세상살이가 열심히 한다고만 해서 미래가 열릴 정도로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할 있었다.

 

지친 몸과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틈도 없이 아내는 다시 수예점을 열었다.  나는 생활을 함께한 상관의 추천으로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국립공원관리공단 본부에 계약직으로 채용 되었다. 원하지 않은 기러기 가족이었으나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근무했다. 집체교육에서는 토지수용에 대한 교육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 하지만도 평화로운 시간은 잠시 2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구조조정의 태풍이 휘몰았다.

 

나는 이곳을 2 직장으로 생각하고 정열을 쏟았지만 당시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생의 쓴맛을 보고 다시 서울의 꿈을 포기하고 대구로 복귀하지 않을 없었다.

 

언덕을 넘으니 절벽이 있고 절벽을 넘어서니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적은 돈으로 부모님 봉양까지 헌신적인 희생을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이제 자존심 같은 것은 지나가는 똥개에게 던져 버리고 당장 다음 날부터 좋은 나쁜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중소 건설회사에 취업하여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당시 노조활동이 극렬하여 노조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사원의 업무수행 평가를 수치화하여 구조조정을 하는 악역이 내게 주어 졌다.

 

해고의 고통을 누구 보다 아는 자신이 회사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그런 임무를 수행 때에 심적 부담과 갈등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인내하고 다독이며 임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하여 회사 경영이 정상화 되도록 나름대로 기여 하였다.

회사를 묵묵히 떠나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슴이 따가웠다. 누군가는 해야 일이지만 총무차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다음의 기분은 하염없이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의논하여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주물을 구입하고 위탁공장에 맡겨 싱크매트를 만들었다. 지하창고도 임대하여 물건을 적재하였다. 차량도 차를 마련하였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나는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아내는 수예점에서 소매를 하고 나는 차량에 물건을 가득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부산의 국제시장에 물건을 일부 내리고 남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순천을 거쳐 광주의 양동시장에 갔다가 남원 중소 도시까지 피로를 모르고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운행 거리가 1,000키로미터가 넘을 때가 많았다.

속도위반 과태료 주차위반 딱지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이 개조 되는 순간인 것이었다.

지구가 둥글 듯이 세상은 너무 딱딱하게 살지 말고 둥글게 둥글게 부드럽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교훈을 그때 배웠다.

전국의 시장은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고 전국의 백화점과 마트에도 들어가 보았다.

물건은 많이 팔았지만 수금이 문제였다. 울산의 전하시장에서의 사례다.

“사장님! 오늘은 물건대금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내가 독촉하면 “네 다음 월요일 오시면 모든 대금을 청산해 드릴께요.”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에 울산으로 내려가면 사장은 야반도주를 하고 없었다.

허탈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위해서 생겼구나!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와 같이 물건 값도 많이 날렸다. 그리고 제품이 내구성이 있도록 생산하여 마모율이 극히 낮아 구매하면 다시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사업은 서서히 어려움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사업을 일체 접기로 결정하였다.

 

 

그렇다고 실망하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어서 공병장교 때의 경험을 살려 건설회사에 취업하여 전무이사로 회사전반의 사업을 총괄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2004 나는 인문학에 대한 포부를 품고 석사과정 선수과목을 익히며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새로운 도전을 했다. 결코 학력 세탁이

아니라 나의 적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제 ! 버는 일에만 신경 쓰고 공부는 포기하세요.”라는 아내의 간곡한 권고를 설득하지 못하고 2006 8 동양철학의 과정을 마치고 논문심사를 통과하여 52세의 나이로 졸업하였다.

 

2007 재직하던 나가던 건설회사가 자금 압박을 받고 휘청거릴 즈음 나는 용기를 내어 사표를 던졌다.

이제 숙달 사회인으로 두렵지가 않았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같은 나는 제일건설 주식회사를 과감하게 창업했다. 그리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다. 결과 관급공사를 수주 받고 새마을금고 사옥신축 등을 도급하여 신명나게 일했다.

 

2010 들어 갑자기 지방 건설 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경성대장염 등이 발생하여 육체적으로 상당이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말하는 우울증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혼자만 아는 1 비밀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기에 이르렀다.

 

 

“그래 내가 몸이 아프다고 생을 포기 절대 없다. 주절주절 거렸다. 어려움이 닥치면 주저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응하여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슬픔을 하도 많이 겪어 내성이 강해 있었다.  이미 멘탈은 어느 누구도 범접 없는 경지에 도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야무지게 운영하던 회사를 매각하고 해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코이카와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해외봉사활동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등록이 완료되어 전문가로 나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비록 낮은 단계라도 지체 없이 실행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한국국제협련단 훈련소에 57기로 입교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프리카 언어인 키스와힐리어를 익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2010 8 인천공향에서 항공기에 탑승하여 두바이를 거쳐 동부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나는 곳에서 현지 주민을 사랑하며 실로 많은 일들을 했다.

새마을 교육은 물론이고 버려진 산야에 그들의 내일을 위하여 망고 아보카도 유실수를 구석구석 심고 가꾸게 했다.

그리고 시골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게와 바소구리, 도리께, 서래, 각종 무지게 농기구를 제작 보급하고 샘을 발견하여 공병장교의 능력으로 파이프라인과 물탱크를 연결하여 급수 모타가 필요 없는 자동 압력으로 구릉지에서도 꼭지를 틀면 곧장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었다.

영양실조의 아이들과 여자들이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산을 넘어 물을 길러 오는 처량한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나는 일요일이면 배낭에 사비로 쌀을 가득 채우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었다.

 

파독간호사 출신인 정숙란선생님과 같이 집집이 방문하고 처참한 환경에 여러 차례  울기도 했다.

죽어가는 말라리아 환자도 14명이나 구했다. 그들은 약을 구매할 돈이 없다. 체온계로 열을 재면 40도가 넘어도 어린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곳에서의 생활에서 스스로 많은 교훈을 얻었다.

결사적으로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중대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요즘도 가슴은 따뜻하고 자긍심으로 충만 되어 있다.

 

2011 해외봉사 활동을 성공적으로 종료하였다. 많이 아팠던 대장염도 우울증도 자연 취유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없다. 하늘의 선물이었다.

내가 귀국하여 국내에 체류할 때에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입원하셨다. 나는 곤충사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700만원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던지 해야만 했다. 열심히 일해서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자력으로 잠시나마 편안히 모실 있었다.

 

 

 2013 3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사감으로 근무했다. 밤에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낮에는 어느 때는 경산 시민회관에서 주택관리사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사로 강연했고 어떤 때는 예절지도사들을 대상으로 병암서원 강당에서 감히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미래를 위해 마련해 가까운 청도 자경소유 농장에 가서 귀촌을 꿈꾸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2017 8월에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본부의 심사를 통과하여 산하기업 이사로 선임되어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또한 대구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서라벌 대학교에서 강사활동을 제의했으나 포기했다. 10여권의 책도 공저로 출판했다. 매년 1 이상 원고를 제출하였다.

 

인생은 마라톤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산을 넘으면 하나의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군가 말한 인생지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틀림이 없었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자신이 절대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한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하고 노력하고 보다 진지하게 내일을 준비 하여  오늘과 내일을 진정으로 음미하며 진지하게 살고자 한다.

어제의 아픔은 오늘의 약이 된다.()

 

감사합니다.

 

성명: 손승호휴대폰-010-8591-3052

        메일-ssh30529@hanmail.net

 

단어형성법 대조, 그 차이점과 공통점 설명

우선 단어란 자립성을 지닌 최소한의 의미단위입니다.  여기서 자립성은 그자체로 홀로 사용할 수 있는 성질로 돌, 바위, 집 등은 단독으로 말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지만, ‘먹었는데’에서 ‘먹’과 ‘었’ 그리고 ‘-는데’는 따로 하면 이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 최소한의 여건을 갖춘 것을 우리는 단어라고 한다.

이러한 단어형성법을 살펴보고 이어서 영어 등 다른 언어의 단어형성법을 대조하여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 본다.

 

어떤 말이 품사로 분류가 되면  단어이고 이런 것을 어휘형태소라 하고 ‘-()ㄹ줄 알다/모르다’와 같은 연결어미와 파생접사는 문법형태소이다. 특히 한국어의 조사는 단어이다 하지만, 기능을 담당하는 문법형태소에 속한다.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내용어로 어휘형태소와 일치하고 그리고 내용어 외에는  기능어로 분류 되는데 이는 문법적 기능을 담당하고 대부분 문법형태소와 일치한다.

 

또한 자립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형태소와 의존형태소로 나눈다.

자립형태소의 예는 달, , 아버지, 별장, 아주 등을 들 수 있고,

의존형태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먹고 같은 용언의  어간과 ‘-/가’‘- /를’ ‘-/는’과 같이 명사 뒤에 붙어야하는 조사 또는 ‘풋(사랑)’‘(욕심)-쟁이’등과 같은 접사가 해당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단어가 문법적 자립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명사는 대부분 자립형태소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의존형태소인 경우도 있다.

고대 그리스어의 명사는 격을 나타내는 접사와 함께 실현되어야 하므로 의존형태소인데 한국어 용언의 어간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으니+어서)에서 먹이 먹다의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먹만으로는 사용을 못하기에 의존형태소이다.

 

기능에 따라 분류해 보면, 한국어에서 ‘먹고, 먹으니, 먹어서, 먹으면’과 같이 먹-에 의존형태소가 붙은 경우에는 ‘음식물을 입에 넣다’라는 뜻은 그대로 있고 동사 어미활용에 의해 형태만 변하지만, ‘먹이’의 경우에는 동물사료와 같이 본래의 의미가 확장 혹은 변화 되었으며 품사도 동사에서 명사로 바뀐 예가 된다.

영어의 worked- worker도 도사에서 명사로 바뀐 같은 경우의 예다.

 

다음은 문장과 관련된 굴절형태소와 파생형태소에 대하여 살펴본다.

문장에서 각 성분들의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어 문장과 관련된 문법정보를 알려주는 굴절형태소의 예를  들어보면,

어미‘--’은 시제가 과거임을 알려주고 조사‘을/를’은 선행하는 명사가 목적어임을 알려주는 것이 한국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어는 -(e)s'는 주어가 3인칭 단수이며 시제가 현재임을 알려 준다.

 

두 형태소의 차이를 설명해 보면,

 

굴절형태소는 대립어 범례를 흔히 보이지만도 파생형태소는 그렇지 않다.

대립어 범례란 모순되는 의미나 기능을 가진 서로 배타적 형태소들의 집합을 말하는데 예로 시제표지가 있다.

서로 다른 두 시제가 한 동사에 동시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상당하는 시제표지 형태소도 동시에 나타나지 못하고 배타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과 ‘--’은 같이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파생형태소는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굴절형태소는 의미를 예측하는 것이 파생형태소보다 쉽다.

 

영어의 굴절형태소 비교급 '-er'의 의미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파생형태소 '-er'은 어떤 단어에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 낸다.

예를 들면 teach-er, toast-er,  New Yorker, draw-er 등을 들 수 있다.

 

굴절형태소와 파생형태소의 함의관계는

굴절이기본이고 굴절이 있는 단어에는 반드시 파생형태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조사와 어미가 매우 발달 되어 상대적으로 영어나 중국어보다 굴절형태소가 많다. 그리고 영어는 굴절형태소의 수로 비교해 보면 스페인어나 러시어어 등 다른 유럽어에 비하여 적은편이다.

 

이어서 한국어와 영어의 접사를 살펴본다.

접사 중 가장 흔한 것이 접두사와 접미사이다.

한국어의 접두사는 ‘헛-소리,-밟다, -높다, -과일’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영어는‘in-correct, re-play, pre-fix, en-large’ 를 들 수 있다.

접미사는  한국어는 ‘존경-하다, 부모-, 나무-, 공손-히’를 예로 들 수 있고

영어는 'parent-hood, journal-ism, social-ize'를 예로 들 수 있다.

접사의 종류에 따른 함의관계는 접미사>접두사>접요사>접환사로 표현할 수가 있다.

 

단어는 기본적으로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누고 복합어는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뉜다.

합성어는 둘 이상의 어근(어휘형태소)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구조의 단어로 한국어와 영어가 유사하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돌탑, 돌다리, 벽시계, 돌아가다’와 영어의 house-wife, high-light가 있다.

파생어는 어근에 접사가 결합하여 파생구조의 단어로 한국어의‘드-높다,-복숭아’영어의 sing-er, moralize 등이 있다.

 

다음은 한국어와 영어의 파생대조를 살펴본다.

먼저 품사유지 파생은 한국어에는 ‘짓-밟다, -쓰다, -돌다, 부채-, 선생-님 등이 있고, 영어는'dis-count, dis-continue, dis-trust'등이 있다.

 

품사가 변화되는 파생은 한국어는 명사에서 동사로 변화되는 것은‘공경-하다, 연마-하다’등이 있고 동사에서 명사로의 변화는 ‘먹이, 마중, 죽음이 있다. 명사에서 형용사로 변화되는 것은 ’학생-답다, 지혜-롭다, 가난-하다‘가 있으며 형용사에서 명사로 변화되는 것은 ’넓이, 크기, -둥이 등이 있고 형용사에서 동사로 변화되는 것은 ‘높-이다, -히다, -추다’등이 있으며 동사에서 형용사로 전환되는 것은 ‘믿-덥다(미덥다), -브다(기쁘다)’등이 있다.

 

 

영어는 ‘en-courage, en-danger’가 명사에서 동사로

'love-er,run-er,teach-er'이 동사에서 명사로 전환되는 경우이다. 'care-ful, girl-ish, child-less'는 명사에서 형용사로

'warm-th,  good-ness'는 형용사에서 명사로 변화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reali-ze, sharp-en, simple-ify'는 형용사에서 동사로

read-able, sleep-y' 는 동사에서 형용사로 변화되는 파생이다.

 

특히 영어에서는 접사와 무관하게 품사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명사가 동사가 되는 경우의 예는 ‘water(물주다), fish(고기잡다)’이고

형용사가 동사가 되는 경우는 ‘free(풀어주다),clean(청소하다)’가있다.

또 동사가 명사로 되는 경우는 ‘permit(면허증), import(수입)’이고

형용사에서 명사로 변화는 관사를 사용하여 ‘the rich(부자), the old(노인)’등을 예시할 수가 있다.

 

한편 일본어의 파생은 순수 일본어 접두사에 의한 파생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한자어 접두사에 의한 파생으로 250여 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끝으로 합성어 대조를 살펴본다.

한국어는 다양한 구성 방법을 통해 다양한 품사의 합성어가 존재한다.

‘앞뒤(명사+명사), 새해(관형사+명사)’등의 합성명사, ‘여러분(관형사+명사),여기저기(대명사+대명사) 등의 합성대명사,’열하나(수사+수사),하나하나(수사+수사)‘ 등의 합성수사, ’갈아입다(동사+동사),좋아하다(형용사+동사)등의 합성동사, 그리고 ’희다희다(형용사+형용사), 맛있다(명사+형용사)등의 합성형용사,

‘한두(관형사+관형사),온갖(관형사+명사) 등의 합성관형사, ’곧잘(부사+부사),하루빨리(명사+부사)등의 합성부사, ‘얼씨구절씨구(감탄사+감탄사), 아이참(감탄사+명사)’등의 합성감탄사도 있다.

 

영어의 합성은 다양한 품사의 합성어가 존재하나 합성명사,합성동사,하벙형용사가주를이룬다. 합성어의 품사는보통 우측핵규칙에 의해 우측 품사에 의해 결정된다.

예시를 하면, bath-room(합성명사), him-self(합성대명사), snow--white(합성형용사), window-shop(합성동사) 등이 있다.

합성어의 강세는 첫음절에 놓인다. 그리고 발음은 본래의 발음과 달라지는 것이 원칙이다.

또 다른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성어의 구성요소는 자유롭지 못하고 bread-and-butter과 같이 고정되어있다.

 

 

일본어의 합성은 합성어 중에서 동사와 형용사가 다른 성분 앞에 위치할 때 동사는 [tobi], [yaki],[tabe]등과 같이 조동사[masu]가 붙는 연용형으로만 나타난다.

합성어의 품사는 우측핵규칙에 따라 가장 우측에 있는 성분에 의해 정해진다.

그리고  합성어의 뒤 성분이 연탁현상에 의해 탁음화하는 경우가 있다. 또 동일성분의 반복에 의한 첩어 구성이 존재한다.

 

특히 일본어에는 형용사 반복([naganaga], 길고길게), 동사반복([yamayama],많은산)

의미강조표현([sorosoro] 슬슬)등의 특성이 존재한다.

 

이상과 같이 한국어와 다른언어 중 영어와 일본어를 중심으로 단어형성법을 대조해 보고 그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본바,.공통점은 미미하고 각 언어마다 특성이 있어 그 차이점이 크다는 것을 확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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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 지금 부산행 열차를 타고 있다.

작년 6월 대구 중앙공원 인근에 위치한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을 방문했다. 1층과 2층을 오가며 원통한 우리 할머니들의 통한이 서린 비극의 역사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깨달음을 얻은 지 1년 만에 소녀상을 뵙고자 주한 일본대사관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부산역에서 내려 우측 초량동 방향으로 걸었다. 5분 남짓 걸어가니 도로 건너편에 충장공(忠壯公) 흑의장군 정발(鄭撥)의 동상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가까이 다가가니 그 위용이 대단하다.

임진왜란 때 부산으로 상륙한 왜군에 대항하여 부산진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이 아니던가.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게도 지척에 일본대사관이 서 있었다. 나는 복장을 단정하게 점검하고 곧은 자세로 소녀상 앞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게 숙연해져서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녀상은 보도 끝선에서 주한 일본대사관의 벽을 보고 다소곳하게 앉아 계셨다. 소녀상 바로 옆에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꿈 많은 청춘, 꽃보다 아름다운 소녀시기에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가 고통과 비명의 세월을 보낸 할머니들의 회한을 생각하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치미는 통탄을 지체할 길이 없었다.

 

소녀상은 평화의 상징으로 아주 적절한 위치에 섬세한 표현으로 잘 건립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에서 소녀상을 이전하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일본대사관의 벽에 설치한 불법시설물도 아닌 정당한 행위에 대한 도전이고 사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주장은 필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속담과 일치하는 허언(虛言)일 뿐이리라.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소녀상을 지키는 한 분이 있었다.

경남 고성에서 올라와 60대 후반의 나이를 잊어버리고 분기 넘치는 활동을 하시는 소녀상 지킴이 김상금 선생이다.

 

그는 일본 정부가 역사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사죄하지 않고 10억 엔의 화폐로 과거의 책임을 면탈하려는 얄팍한 행동을 취하기 때문에 결단코 소위 위안부 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제 위안부 할머니들을 한낱 성매매 범으로 몰아가는 적반하장의 조치로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있을 수 없는 나쁜 행동이라고 일갈했다.

 

때마침 아베 신조 일본 총리 특사단이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하여 6월 10일부터 이틀간은 다우치 치즈고 여사가 3천여 명의 고아를 돌보며 일생을 마친 전남 목포의 보육시설 ‘공생원’을 방문하고 그 다음날 우리 정부를 예방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향해 겉으로는 우호국으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연막을 치면서 수시로 망발을 일삼는 행위를 중단하고 피해 당사자인 강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일 합의를 거부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책임 있는 전향적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킴이 선생님께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구로 귀향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왜?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속죄하고 청산하지 않는지 한없이 의아스럽기만 하다.

 

모름지기 소녀상은 그냥 위안부 소녀상이 절대 아니다. ‘일본군 강제(强制) 위안부 소녀상’이다.

권력이나 위력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속임수 등으로 저항능력이 없는 연약한 소녀를 억지로 끌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강제(强制)라는 단어를 반드시 기재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인권기자단 손 승 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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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4.일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교육센터에서 뜻 깊은 인권기자단 간담회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무심코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파란 신호등이 반짝 거리는 것을 보고 달음박질로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2.28기념 중앙공원 초입에서 부터 어떤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동성 간 성 행위자는 대한민국에서 물러가라.”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서울보다 먼저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구에서 퀴어 문화축제가 열리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여기가 대구 경북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퀴어 문화축제 저지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현장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결사항전의 의지 같은 것이 엿보였다. 좌판대를 깔고 반대 서명도 받고 보도를 따라 어림잡아 100미터 정도의 길이에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저마다 다른 용어의 피켓을 들고 침묵의 홍보 내지 무언의 시위를 병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공원길을 따라 깊숙하게 들어가 세세하게 살펴보았는데, 다소 많은 사람들이 저지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에는 청소년들이 춤을 추면서 자신의 의사를 담아내고 있었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초미(焦眉)의 관심을 보이는 관중들이 예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실명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청년은 “청소년 에이즈와 동성애자 증가가 전국에서 가장 큰 대구에서 동성애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고, 군 입대를 목전에 둔 아들을 둔 어떤 아주머니는 “군에서 동성애를 허용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걱정이 태산이라 발길 따라 나왔다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 격한 마음을 토로 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구 동신교회와 성일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쌍방 간에 피켓을 빼앗고 찢어버리는 충돌이 있어 이를 막고 격리할 목적으로 운집한 경찰들 사이로 빠져 나와 이번에는 좌회전하여 대구백화점 방향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소위 레즈비언과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적 소수자들의 퀴어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수개의 대형천막을 설치하여 무대까지 140 미터 정도 길게 늘어서서 성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무대에는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이 축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정의당, 녹색당, 유니크(영남대퀴어동아리), 퀘스트(대구대퀴어동아리), 퀴반스 (경북대퀴어동아리) 등 37개 단체가 부스를 설치하고 저마다 성 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고 있는 현장이 목격 된다.

 

비온뒤무지개재단 공익 캠페인 “나는 앨라이(Ally)입니다"의 유인물을 보니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여 차별에 반대하며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요 전파경로가 된다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통계 및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의 제3차 국민건강종합계획(2011~2020)을 보면 역학적 특성에서 남성동성애의 성 접촉이 전파경로인 것으로 인정된다는 보고가 있으며, 이러한 근거에 기반 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퀴어문화축제를 주최하는 측에서는 성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자는 주장이고 그 반대편에서는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쪽의 주장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심히 우려되는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타협하여 절충점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라고 힘주어 주장하고 싶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인권기자단 손승호 기자

 

 

 

 

 

홍성수 교수는 법철학, 법사회학 등의 기초법학 방법론을 바탕으로 인권이론, 기업과 인권, 지역사회와 인권, 학생인권, 표현의 자유와 인권, 여성인권, 국가인권기구 등의 주제를 연구했다. 2009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숙명여자대학교 홍성수 교수의 인권특강을 듣기 위하여 기대감을 가지고 대구인권위원회 교육센터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강의는 다소 늦게 시작 하였다. 막간을 이용하여 실내를 둘러보니 우측 한쪽에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예명복지촌’에서 온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병기 원장님은 멀리 안동에서 달려오신 인권에 관한한 열성적인 분이다. 이는 우리 지역에도 인권에 대한 열기가 대단함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혐오표현은 주요 인권이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혐오표현에 관한 두 선택지는 물리적인 국가 규제를 거부하고 단연 나쁜 표현에 맞서 싸운다는 표현의 자유를 근본으로 하는 전투적 자유주의와 반대로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표현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규제옹호론으로 갈라진다.

 

오늘날 미국은 사상의 자유를 신봉하는 대표적인 국가로 혐오표현을 형사 처벌하는 규정이 없는 반면, 독일과 영국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은 차별적 괴롭힘, 차별표시, 공개적인 멸시와 모욕 위협, 그리고 증오와 선동이 있으며 소수자의 실생활에 미친 영향은 고립과 단절, 일상생활의 유지가 어려울 지경이며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낙인(烙印)과 편견(偏見)의 강화, 사회적 배재와 차별의 강화, 성적대상화의 심화와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하여 그 사회적 영향이 지대하다.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혐오표현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독일이 형법도 아닌 다른 차원의 소수자를 위한 상징적 규제조치를 하는 것처럼 차별 시정 기구를 통한 적극적인 혐오표현 규제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혐오는 증오로 변화하여 결국 증오범죄로 연결되어 진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 황산테러사건이 바로 실증적인 사례인 것이다.

 

레지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소수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들 편에 섭니다.”라고 말한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의 행동이나 게이클럽 펄스 총기 난사사건 추모사에서 오바바 전미국대통령이 보여준 소수자를 향한 발언은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를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이라 여겨진다.

 

열띤 강의는 100분 동안 쉼 없이 이어졌다. 50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생리적 현상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숙이고 죄짓는 모습으로 삼삼오오 뒤로 빠져나와 화장실에 다녀오곤 했다. 앉아 있는 청강생들도 집중된 열기가 흐트러지고는 있었다. 새로운 주제와 알찬 강의가 조금은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오늘 마지막 릴레이특강 혐오표현과 인권의 결론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 그 차별은 없어야 한다.”이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실천해야할 과제이다. 인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겨본다.

 

끝으로 이렇게 4차에 걸친 릴레이 특강을 마련하여 인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권혁장소장님과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인권기자단 손승호

문득 고향이 그리워 안강에 갔다.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오려고 승용차를 세워두고 시외버스를 타고 안강 터미널에 도착했었다.

시티재를 넘어서면서 차창 밖의 풍경만 보아도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망테기 둘러메고 소풀을 뜻던 학창 시절이 어제처럼 다가온다,

이유 없이 기분이 좋다.

 

하지만도 두루두루 안강 터미널을 둘러보고는 내 마음은 싸늘하게 변했다.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 동선의 구조, 내 고향의 리더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분노가 치밀어 온다.

아프리카의 화장실 보다 도 관리가 엉망이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중국의 시골 화장실이 연상된다.

 

집으로 돌아와  요즘 지자체 출마자들의 선거 홍보로 가득한 페이스 북에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경주시장 출마자는 안강읍은 어떻게 할 건데, 그것부터 밝혀라.

영원히 경주시의 변방으로 취급하여 시의 들러리만 세운다면, 안강은 행정구역을 포항으로 편입하는 것을 신중히 고려해야만 한다.

안강을 발전시킬 복안이 뭐냐고?

선거운동을 하기 전에 안강의 대표적 공용시설인 안강 터미널부터 가 보고 시작하라.

순수한 안강 농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살아가시는지 확인하시오.

발품부터 먼저 팔아 주시요"라고 용감하게 기록했다.

 

안강의 지도자들은 안강읍민들이 이용하는 공용시설을 세세히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다음 출마를 생각하세요.

                                                                        (안강을 사랑하는 무명의 출향인)

대구 박정희아카데미 강좌의 지속(持續)을 기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박정희 대통령님을 우리민족의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가난을 물리친 존경하는 분으로 제 가슴 속 한 컨에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구에서 박정희아카데미 강좌가 열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일회성 강좌가 아닌 체계적인 강좌로 자리 잡아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는 12주간 강의를 들으며 많은 지식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원만한 강의를 위해 수고해 주신 강영욱 원장님과 관계자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음지에서 따뜻한 차를 제공해 주신 자원봉사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함께 교육을 받았던 1기 수강생 모두에게 경외감을 표합니다.

 

돌이켜보니 12주가 금방 지나간 것으로 아쉬운 마음이 절절합니다.

지난 2월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강좌개설을 확인하고 행여 선착순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즉시 방숙희 간사님께 전화하여 교육신청을 했습니다.

 

 

드디어 35일 첫 강의가 열리던 날, 만사를 제쳐두고 일찍 도착하여 연단을 보고  둘째 줄 오른쪽 첫 좌석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12주 동안 똑 같은 자리에서 귀를 기울이고 또 보고 느낀 사항 몇 가지를 진솔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구를 폄훼하자는 것이 결단코 아니라 대구 박정희아카데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개선하고 발전하라는 의미에서 충심으로 드리는 소인의 고언(苦言)임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첫째. 정치인은 참여를 배재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예시를 들면, 강원장님께서 고민하여 입교시켰다는 두 사람의 입교목적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공부를 했습니까? 한 사람은 첫날 얼굴만 비추고 사라졌고, 또 한사람은 정확하게 21시간 4분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래도 괜찮으시다면 응답을 해 보세요?

 

특히 한 사람은 3264회차 교육시 1시간 지각하여 19시경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 아카데미 측에서 뜬금없이 교육생을 향하여 인사를 시켰고 그는 인사를 하고 1시간 4분경과 후 2014분경 교육장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대전에서 오신 분이 제게 질문했습니다. "저 분은 누구냐? 왜 인사를 시키느냐?” 제 소견으로는 참 답답했습니다. 제발 이런 일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독점적인 질문을 분명히 통제 하셔야 합니다.

수업시간마다 같은 사람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비슷한 질문을 하는 건 질문자와 일부 동조자들은 시원할지 모르나 정말 짜증나는 일입니다. 열정으로 궁금한 사항이 많지만도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고 더 알고 싶은 사항은 개인적으로 교육시간 후나 인터넷질문으로 대체 했으면 합니다.

어렵지만 사회자가 적절하게 조정하고 통제했으면 더 좋은 교육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전국에서 아무리 유명한 강사라는 소문이 있더라도 확실한 소견이 부족한 강사는 선정하는 일이 어렵지만 가급적 배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사의 영향력은 실로 큽니다.

예시를 들면 9강 강의 말미에 강사님은 박근혜대통령님이 권력이 있을 때 행사하지 않아서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도 제 의견을 다릅니다. 박근혜대통령님께서 끝까지 국법을 준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획 탄핵을 저질러 죄 없이 서청대에 계시게 하고 재판이 강행되어 24년형 등 얼토당토  않은 선고를 하는 놈들이 만약에 국법을 어겼다면 분명 더 큰 음모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넷째, 입학생을 잘 선정해 주십시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박정희아카데미 교육생이 박정희전대통령님을 기피하는 발언을 듣는 순간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 이외에도 앞자리 근처에 자리 잡고 강사님의 강의에 톡톡 참견하는 누님, 수업 진행 중에 코를 푸는 형님, 수업중은 아랑곳없이 잡담과 휴대폰 소리가 울리고 안하무인 큰 소리로 통화하는 무 예절은 애교로, 감기가 드셨으니..., 사업이 바쁘니까? 등 이유야 충분하지만도 우리 모두가 자성할 사항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구미 생가 방문과 청도 신도리 새마을기념관 방문에서 원장님이하 직원 분들이 동참하여 주시고, 오세창교수님의 강의와 박은도 님의 섹스폰 연주 와 원맨쇼 등의 즐거운 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430일 우리 교육 동료 임재현님이 동대구 인근에서 “박정희 대통령 정신 가르치기 교육관 및 전시관”을 개관하던 큰일 하던 날에는 우리 교육동료님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참 인색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별활동이 전무한 것과 비교육생 3명이 아무 통제 없이 교육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질문에 참여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는 적절히 통제하여 2기부터는 진심으로 개선을 바랍니다.

 

끝으로 많은 점이 부족한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첫날 이었죠. 행사진행 때 기대가 큰 것에 반하여 너무도 실망하여 고함을 질렀던 일은 집행부에 사과하고 잘못을 뉘우칩니다. 기계적인 실수는 얼마 던지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애국가를 1절만 부르는 것은 좁은 소견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했습니다. 더군다나 외부에서부터 대구광역시장후보가 진을 치고 있었고 실내에 들어오니 또 다른 이모 후보를 추종하는 비입교생 모 구청 의장을 지낸 사람이 앞자리에 앉아 헛소리를 하는 것에 분노하여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습니다. “야 임마들아! ‘박정희 정신’을 배우는 이 숭고한 자리에 너희들 뭐하는 짓이고?

 

 

그는 다음 날 부터는 오지 않았습니다. 교육장 밖에서도 저는 마치 깡패처럼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우리 죄 없는 존경하는 박근혜대통령님을 출당시켰던 패륜행위를 한 집단이 어디서 표를 구걸 하나? 양심이 있어라. 이놈들아!

 

5회 강의 때부터 붉은 유니폼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자들이 미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 합니다. 상처 받은 분들에게 진정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다시 한 번 대구 박정희아카데미의 지속과 발전 그리고 나라 지키는 절박한 일에 동행을 기원하며 두서없이 부족한 제 교육소감을 마칩니다.

 

모든 분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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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의 들판을 생각하며

일본의 농혼(農魂)을 엿보다.

-일본 농업 선도경영체 방문기-

손 승 호※

 

 

차 례

   . 일본의 문화 개괄(槪括)(槪括)

   . 사전 워크숍

   .  설국의 니가타현

   .  선도경영체 방문 강행군

   . 구로베 협곡 탐방/옛 마을 거리

   . 선도경영체와 총영사 관저 방문

   . 니가타 식량상 소개

   . 맺는 말

 

 

이 글은 안강 평야를 바라보며 성장하여 항상 우리나라의 농업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오던 차에 금회 농림축산 식품부와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이 주최하고 한국농업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2017년 일본 농업 선도경영체 방문 국외훈련에 참가해서 인천공항을 출국하여 해단식을 할 때까지 일본에서 보고 느낀 문화를 포함한 종합적 체험내용을 비교적 진솔하게 기록한 것이다.

 

 

※ 안강 가마실 출생,, 철학박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상조회 이사 주)트릿지 파인더, 인권기자.

 

. 일본의 문화 개괄

 

일본의 수도는 동경(Tokyo), 면적은 380,000㎢로 한반도의 1.7배이고

인구는 128,085,000명 내외이다. 일본의 민족 구성은 다양하다. 홋가이도 북쪽에 거주하는  원주민 아이족의 경우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코카소이드 쉽게 말해 유럽 인종 계통이라는 설도 있고 러시아계라는 설도 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인의 경우 대륙에서 건너온 북방계와 남방계가 있다.

 

북방계라 함은 몽골, 한반도, 중국에서 대륙인을 말하고 남방계라 함은 동남아  쪽이나 태평양에서 이주한 대륙인을 말합니다.

일본인의 조상이 한국인이란 설이 많은 것에 놀랐다. 실제로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한국인의 유전자가 많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한다.

 

해양성의 온화한 기후를 가진 섬나라 일본은 태풍이나 지진 등 각종 재난이 많기에 뭉쳐야 산다는 생각이 팽배하며 33 사람이 모여도 지도자(오야봉)를(오야봉) 뽑아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것이 특징이다.

 

종교는 신도와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기타 종교가 있는데 방문 기간 동안 교회건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은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아기의 건강과 장래의 복을 빌고, 또 청년이 되어 혼인을 할 때는 교회나 천주교 등에서 현대식으로 화려하게 치르며 죽어서 장례식을 치를 때는 사후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교적으로 치른다고 했다.

 

이처럼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여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이룬 일본은 현대화적 이면서도 고도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이면에 그들은 옛 모습의 운치 또한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돋보였다.

 

일본은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으로 2,800㎞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다. 국토는 혼슈, 시코쿠, 규수, 홋가이도(北海道)의 주요 섬과 4,0004,000여 개 이상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산지로 구성되어 있어 경작면적은 약 16%16% 정도이다. 현재 일본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천황은 상징적 원수로 일본 헌법에서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재 125대 아키히토 (明仁天皇)이고 총리는 아베 신조이다.

 

행정구역상으로 47도도부현(都道府縣)47 도도부현(都道府縣)으로 나눠  동경도(東京都),홋가이도(北海道동경도(東京都), 홋가이도(北海道), 경도부(교토부, 京都府), 대판부(오사카, 大阪府) 등과 43개 현으로 이루어져 지방자치제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이 중에 니가타, 도야마, 나가노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화폐는 엔화로 현재  966원이다. 이웃나라이기에 시차는 없다. 그러므로 시계를 현지시간으로 맞추는 번거로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갔을 때 전기 전압은 100V 50HZ로 플러그를 사용해야만 했다.

 

. 사전 워크숍

 

대구에서 광명역까지 KTX로 이용하여 갔고 그곳에서 공항까지는 무정차 버스가 20분마다 운행하고 있어 바로 탑승하여 주변 경관을 보면서 이동하여 인천공항 1번 게이트에서 하차하여 영종도 로열 엠포 리옴 호텔 세미나실로 향했다.

일본의 식량산업 정책 등을 이해하는 사전 워크숍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을 돌아서니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사진 1: 선명한 태극기가 주변 조경과 어울린다)

 

 

국외 훈련 단원은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처음으로 회의실에서 대면하였다.

한경대학교 이덕형 교수와 전북 김제에서 특수미를 생산하는 으뜸 농원의 대표이고 국내 농업마이스터 1호인 최남훈 전문가를 포함하여 기라성 같은 농업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혼자서 3333 핵타를 기계화 영농을 하는 전문가도 있었고,  400400 핵타의 간척지에 농업법인을 운영하는 전문가 등 대농을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단원들이 쌀은 농촌의 힘, 농촌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농민들도 이제는 생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탈피해 생산에서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차별화하고 체계화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관행적인 쌀농사로는 고소득을 올릴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우리나라 농촌 현실을 직시하며 저출산과 농업인들의 고령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여 그 해결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외훈련의 추진배경과 필요성은 대한민국 쌀 생산 조정제 도입 및 정책현안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우수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고 우리나라 식량산업의 정책과 농산업 현장이 원활한 소통관계를 형성하여 공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일본 식량산업 정책 및 지원 사업 현황과 우리나라 지원정책을 비교 참고할 필요성이 충분하다.

 

또한 대한민국 쌀 생산자 단체 및 생산자 농민의 글로벌 마인드 재고 및 생산품목 다각화 사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우수농가 및 선도 경영체의 현장 활동을 배울 필요성이 있고 국내 지역별 식량산업 종사자에게 다각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선진 농업국의 우수사례를 공유하게 하여 새로운 정책제안이나 아이디어 도출이 필요하며 국내 쌀 생산 조정제도의 폭넓은 이해와 협조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외국의 사례를 학습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추진목표는 일본의 식량산업 정책과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농산업 현장 벤치마킹을 통한 국내 도입 가능한 아이디어 도출과 식량산업분야 첨단 기술 개발회사 방문을 통해 식량산업 분야의 첨단산업 도입과정 및 도입 후 성과 등을 학습하고 국내 산업에 도입 및 가능성 도출에 있다.

 

그리고 일본 니가타현 식량산업 농업인들의 우수사례를 공유하게 하여 새로운 정책제안 및 아이디어 도출과 쌀 전업농가에서 품목 다각화를 실천한 성공적인 일본 농가의 활동과 가공공장 및 식품 제조회사 벤치마킹을 통한 아이디어 발굴을 목표로 하며 부가적으로 다각화 사업을 실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농기계 현황을 파악하여 국내 다각화 사업에 필요한 품목의 자동화 기계 도입 및 개발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 있다.

 

이어서 일정계획을 설명 듣고 방문 기관에서의 예절과 유의사항을 주입시켰다..

 

다음은 조를 구성하고 조별 연수목표를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하나, , .”하는 사이 팀장을 손가락으로 지정하는 순간 나는 거침없이 대농을 하는 한 사람을 지목했다. 하지만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의 손이 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고 실망하여 즉시 스스로 자격미달을 이유로 사양의 뜻을 표현했으나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 해외훈련에 참가할 바에는 우리 팀이 화합하고 단결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자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석식을 마치고 다시 세미나실에 모였다. 전문가가 앞으로 나와 “일본 쌀 품종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실시했다.

그는 농진 종묘(주)육종연구소(주) 농장장으로 근무하다가 1996년 논에 나가시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사고에 기인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그때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벼농사 최고의 장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남들이 다 하는 일상적인 농사기법으로는 “농촌에서 희망이 없다.”라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종묘회사 근무 시 출장 등으로 알게 된 일본인 농사꾼들을 찾아 농사에 대한 선진기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일본 NHK방송을 시청하다가 항암 효과가 높은 유색미와 관련한 내용을 보고 그 특수미 종자를 구하기 위하여 한걸음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일본에서 쌀 소비 트렌드가 고품질 쌀에서 특수미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현미식 전용 쌀인 “밀크 퀸”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 품종은 당뇨병과 대장암에 효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이어 신장병 환자에 도움이 되는 저글 루테린 쌀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이론으로만 농사를 지으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라고 우려 섞인 눈초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은 예측한 그대로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기능성 쌀은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일반 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비싼 값으로 그것도 전량 직거래로 팔리고 있다.

 

소비 패턴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하며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201711월 현재 현미 식용 저아밀로스 쌀, 신부전증과 신장병 환자를 위한 저글 루테인 쌀, 항산화 작용 성분이 있어 노화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녹원찰벼, 적색 찰벼를 생산하는 등 기능성 쌀 생산에 대한 열정으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매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전량 계약판매로 생산량 전체를 소화하고 있다. 그는 고객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계약판매를 통하여 서울권역에서 90% 이상을 소비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재고가 쌓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생산량을 초과하는 주문이 폭주하여 주변 이웃 농가의 쌀까지 팔아 준다고 한다.

일본의 쌀 품종은 고시히까리로 연구를 거듭하여 개량품종이 나오고 있다는 말로 특강을 마쳤다.

 

예정된 워크숍은 오후 8시를 넘겨서 종료되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안동에서 참여한 40대 초반의 여주농업전문대를 졸업한 청년 농업인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소통을 하기 위하여 호텔 인근의 호프집을 찾아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수기간 내내 성실하게 임할 것을 다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주변을 살펴보니 영종도의 구석진 곳으로 허허벌판 속에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바닷바람이 매섭게 볼을 때린다. 이슬비마저 흩날리는 인천에서의 하루 밤은 이렇게 깊어만 간다.

내일은 06:00시 정각에 모닝콜이 울린다고 공지했다.

 

. 설국의 도시 니가타

 

아침이 희뿌옇게 밝아 오는 순간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세면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에둘러 떠날 채비를 마쳤다.

07:10분경 짐을 싣고 셔틀버스에 올라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영종대교의 교각 상판이 운무 속에서 마치 꿈틀거리는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리며 보였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공항 1번 게이트 앞에 당도했다.

우리는 입국 수속을 완료하고 다시 18번 게이트로 이동하여 탑승 대기 장소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가타행 항공기는 현지 기상 사정 악화로 2시간 연기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차분하게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잠시나마 한국농업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저 출산 고령화의 심각한 문제가 엄습하여 우리나라의 농촌생활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고 농민들의 삶을 서서히 옥좨올 것은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무대책이 대책인 것처럼 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농업분야 선 지식인이 발 벗고 나서고 정부 관계자는 이 다급한 현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여 상응한 해결책을 조속히 마련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은 무엇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역동적인 국제공항의 면모를 갖추고 외국의 무수한 손님들을 친절하게 맞이하는 광경이 흐뭇하다. 청소를 하는 로봇이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이 경이롭다.

 

 

 

 

(사진 2:)

우리는 예정시간을 2시간 넘겨 기내에 오를 수가 있었다. 행운번호 43D 좌석은 본인이 좋아하는 창가 쪽이다. 잠시 후 KE763기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창밖에는 새털구름이 새하얗게 여러 모양으로 변신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기내 중식인 도시락이 배달되어 맛있게 먹었다. 1시간 50분(서울-대구간 KTX 소요시간과 동일) 정도) 지나 항공기는 나가타 공항에 착륙했다. 인터넷 일기예보와는 달리 바람은 심하게 불지 않았고 이슬비만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가타 공항은 예상과 달리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옛날 김포공항의 30% 수준으로 지방공항의 초라함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일본의 입국 수속은 다소 까다로웠다. 나는 허리에 찬 혁대까지 풀고 철두철미한 검색을 2회나 반복한 후에야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소 기분이 상하지만 테러 방지를 위한 자구책이라 여기고 이해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가타에 첫발을 디디며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왜냐하면 부모님께서 해방 직전까지 일본의 오사카 등지에서 수년간을 살아오셨기에 모종의 상상을 하면서 하늘도 쳐다보고 밟고 있는 땅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일본의 니가타현은 면적 12,582㎢의 도시이고 중심도시는 8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니가타시이다..

이곳에는 3개소의 온천이 있다. 먼저 에치고 유자와 온천은  일본의 소설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소설, 설국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온천수는 약알칼리성 단순천으로 온도는 32도에서 83도이다.

 

그다음은 세미나 온천으로 1904년 석유 발굴 탐사 시 우연히 발견된 온천으로 지금도 온천수가 10m10m 이상 뿜어져 나오고 있다. 세미나 온천 지구에는 작은 수족관이 있고, 근처에 자연공원이 있어 온천 후 산책하기에도 좋다. 온천수는 식염천으로 온도는 70도에서 90도로 표기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치 오마타 온천은 일본의 온천중에서 라듐 함유량이 많은 온천으로 예부터 고 다카라 노유로 알려져 있다. 고 다카라 노유라는 말은 자식을 얻게 해 주는 온천이란 뜻이다. 온천수가 미지근해서 밤새도록 탕 속에 들어가 있는 풍습도 있다. 방사능 온천수로 온도는 39도 정도이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이용하여 약 2시간 걸리고 경도 및 위도가 우리나라 경기도의 여주 이천과 비슷한 위치 선상에 있는 니가타는 쌀을 비롯한 질 좋은 식재료가 풍부하게 생산되고, 그것을 이용한 맛있는 향토음식이 만들어지는 ‘식재료와 미식의 보고’로 전해진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에서 가장 눈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쌓인 눈은 봄이 되면 녹아서 깨끗한 물로 변하여 니가타의 대지를 적시고 그 대지에서는 각종 질 좋은 식재료들을 생산한다.

특히 쌀은 일본에서 생산량 최고를 자랑하며 그 맛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쌀로 빚어지는 일본 주는 1922년에 창업한 청주 학 가이 잔(八海山)을(八海山) 비롯하여 90개 이상의 양조장이 서로 경쟁하며 맛을 추구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맛있는 쌀을 이용한 떡을 비롯한 각종 가공식품,  달콤하고  살살 녹는 듯 맛있는 북쪽 분홍 새우,, 우리나라 청도의 감처럼 씨가 없는 오코사 감을 이용한 술과 서벗 등 다양한 식품들이 개발되어 있었다.

 

. 선도경영체 방문 강행군

 

일본 연수 훈련 단원들은 첫 일정으로 니가타현 농업종합연구소 작물연구센터를 방문했다.

이 연구소는 1874년 네가 탄현 수예장으로 나카 칸바라 군 시모 토코 로지 마신 덴에 설치되었고 1895년 농사시험장이 나카오카 혼죠 오오 아자사 카노우에 에 창설되었다. 1950년 니가타현 농업시험장으로 개칭하여 1997년 농업종합연구소와 작물연구센터로 재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구 방침은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농업과 식품산업 발전을 위해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현장과 하나가 되어 기초적이며 선도적인 연구를 효율적으로 실시한다. 그와 동시에 산학관과 보급기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고 지역성을 중시한 영농인의 싱크탱크로서 연구를 추진하여 기술혁신과 새로운 기술 창출을 지향하고 있었다.

 

국제화에 따른 산지 간 경쟁에 대응한 전략적 품종 개발,, 저비용과 고품질 생산기술 및 농산물 브랜드화 기술, 소비자와 지역의 니즈를 기초로 한 지역농업시스템의 확립과 영농인 중심의 복합영농 추진을 위한 경영관리기술과 지원 기술,,

 

안전, 안심, 건강지향과 환경보전 등을 배려한  다양한 기술과 자원절약, 순환형 농업기술, 새로운 산업분야의 창출, 육성을 위한 바이오테크놀로지, IT 활용 등 고도의 첨단기술을 연구 항목에 포함하고 있었다.

 

조직도를 보니 농업종합연구소는 소장과 부소장 그리고 관리부 기획정보부 기반연구부 AGRI FOODS BIO 연구부 전문기술지도 실이 있었고 작물연구센터는 육종과 와 재배 과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요 부서를 설명하면 기반연구부는 농업경영관리, 농축산물 유통 및 상품화의 경영 유통이 있고, 환경부하 저감을 위한 농경 관리기술을 재배환경에서 토양보전기술은 토양보전에서 다루고 농업농촌정비기술, 기계화작업을 위한 기술은 생산공학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바이오 연구부에서는 원예육종 공학에서 대량증식 및 유전자해석 과 단리기술을 벼 육종공학에서 조직배양 및 유전자 해석에 의한 신품종육성을 다루고 미생물공학에서 미생물 농업 및 식품공업 이용기술을 담당했다.

 

작물연구센터 육종과는 품종육성으로 수도 신품종 개발을 담당하고 품종 선정에서 장려품종 결정 조사 주요 농작물 종자생산기술을 책임지며 밭작물은 밭작물의 우량품종 선정과 안정생산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재배과는 재배와 품질은 수도의 안정생산과 품질평가기술, 작물 영양은 작물 영양진단과 시비개선 기술,, 병해는 주요 농작물의 병해 방제기술,, 충해는 주요 농작물의 충해 방제기술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진 3:)

 

유관기관은 원예연구센터가 세이 로오 마지에 있고 축산연구센터는 산죠오시,, 식품연구센터는 카모 시,, 고랭지 농업기술센터는 쯔난마찌,, 중산간지 농업기술센터는 카와 구찌 마지,, 사도 농업기술센터는 사도시에 위치하여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다.

 

 

살펴보니 정말 촘촘하게 업무를 분담하여 일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물연구센터의 경우만 보더라도 육종과는 수도 우량품종의 개발(인공교배), 육성된 품종 계통의 특성과 지역 적응성 조사 및 우수품종의 선정(포장 선발,(포장선발 식미선발), 품종 특성 유지와 양질의 원종 공급(원원종( 파종작업), 대두와 맥류의 우량 품종 선정 및 재배기술(대두 장려품종 결정 조사)을) 하고

재배과는 고품질과 우수 식미 쌀 안정생산을 위한 기술개발,, 저비용 대규모 경영대응기술 개발(수도 고온처리 시험),), 토양 및 비배관리 기술의 개선(도열병균의 접종), 병해충 발생 예찰과 방제기술 개발(페로몬 트랩에 의한 방귀벌레 발생조사)을) 하고 있었다.

 

시설물을 둘러보니 고시히까리 기념비, 나미카와 상이 우선 보였고 연수관, 육종 합리화 시설, 교배 세대촉진 온실, 바이 테크 육종 온실, 고시히카리고시히카리 BL 종자저장고, 격납고, 농기 실험실, 첨단 원예작물 연구 온실, 원종 건조 조제 시설, 도열 병균 레이스 검정 온실, 업무동, 관리동, 연구동 건물이 용이 주도(용이 주도하게( 잘 배치되어 있었다.

 

고시히카리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수도(水稻:논벼) 품종()로 농림 1호를 부()1944년에 교배되었다. 1948년부터 후쿠이현 농업시험장에서 계통 육성이 계속되어 1956년에 농림 100호로 등록되었고, 고시노쿠니(고시노 쿠니(니가타에 길이 빛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고시히카리로 명명되었다..

니가타현은 누구보다 앞서 고시히카리의 식미성에 주목하여 일본의 다른 어떤 지방자치단체보다 먼저 장려품종으로 지칭하였으며 재배기술의 개선에 힘스며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다.

현재 고시히카리는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쌀로 일본의 38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979년 이후 계속해서 일본 경작면적 1위를 자랑하고 있으며(1994년 현재) 경작면적은 5353만 핵타에 달하고 있다. 올해는 고시히카리가 니가타현 농업시험장에서 교배된 지 50년째에 해당하는 해이며 또한 니가타현 농업시험장 창립 100 주년이 되는 기념할만한 해이다. 이에 고시히카리의 빛나는 기록을 만들어 낸 선대의 공적을 기리고 후대에 새로운 우량품종의 개발을 기원하며, ()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바이다.

 

1994. 11. 길일

 니가타현 농업시험장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 협찬 회장

   니가타현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회장 쿠리하라 유우이치

 

다른 설명을 듣지 않아도 비문에 고시히카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미카와 상()

 

나미카와 세이시와 벼 품종 스이토오 노 오린1(水稻農林1)

1920년대 니가타 쌀은 품질이 나빠서 도시의 소비지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에 나미카와 세이시 등의 육종 그룹은 모리타 와서 품종과 리쿠우132호 품종을 조합시켜 1931년에 노 오린1(農林 1号)1号) 품종을 만들었다.

 

이 노 오린1(農林 1)는 당시로써는 수확시기가 빠르고 수량도 많을 뿐만 아니라 쌀의 품질과 맛도 뛰어난  훌륭한 품종이었다.

1931년부터 니가타현은 이 노오린 1(農林 1)를 널리 농가에 추천하였다.. 그 후 이 품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고시히카리, 고시지와세고시지 와 세. 호오넨와세, 히츠 니시키 등의 품종을 탄생시켰으며 오늘날의 니가타 쌀의 성과를 드높여 왔다.

1952년에 이 노 오린1(農林 1)를 육성한 나미카와 세이시의 흉상을 이 땅에 세우고 오래도록 그 공적을 기리게 되었다.

 

 

고시히카리 BL 종자 저장고가 있었는데 고시히카리 BL은 니가타현 내의 도열병균 레이스의 분포 상황에 따라 높은 방제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BL품종 수 품종을 일정 비율로 혼합한 원종을 종자장에 제공한다. 그러므로 고시히카리 BL은 계획한 대로 생산하며 품종마다 대량으로 확보하고 보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이 창고에서 고시히카리 BL의 일반재배용 종자생산의 바탕이 되는 원종을 대량으로 저온에서 저장한다.

사양은 온도 10도씨 습도 제어는 없고 저장실 면적은 132, 저장능력은 60,000kg이다.

 

바이 테크 육종온실은 생명공학을 벼의 품종개량에 응용하여 오랜 세월을 요하는 품종개량 기간을 단축하고 획기적인 우량 신품종을 육성하기 위한 시설이다. 배양실험실, 무균실(clean room), 배양실, 순화 육성 온실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일련의 기능적 배치가 이루어져 있었다.

 

교배 세대촉진 온실은 벼의 인공교배와 세대촉진을 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벼는 자신의 화분을 수분하여 종자를 만들기(자기 수분)(자기수분) 때문에 품종개량을 하는 경우에는 인공적으로 다른 벼의 화분을 수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벼의 품종개량에서 효과적인 선발을 하려면 교배한 다음 자가수분을 반복해서 실시하여 세대를 거듭하여 유전적으로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통상 니가타현에서는 실외에서 재배했을 경우, 1년에 한 차례밖에 세대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시설에서는 인공적으로 습도와 햇빛이 드는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1년에 3세대를 진행시킬 수가 있다.

 

육종 합리화 시설은 벼의 품종개량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시설이다. 니가타현의 벼 품종개량은 숙기(熟期)나 재배의 편의성 등 논에 있어서의 특성 외에 쌀의 모양이나 맛 등의 성질을 개량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 시설에서는  현미의 외관 조사와 실제로 사람이 먹었을 때에 맛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한다. 또한, 외관상의 품질과 식이 즉 맛에 대한 조사를 객관적이고 효율적이면서도 대량으로 실시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기기를 사용하여 쌀의 맛과 관련된 성분과 물리적 특성 등의 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첨단 원예작물 연구 온실은 배양 조작을 통하여 농작물을 대량으로 늘리거나 단기간에 품종을 고정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배양 조작을 위한 재료를 재배한다. 또한 배양 조작에 의해병속에서 재생한 식물을 바깥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시설로도 사용된다.. 재배실과 기계실을 합하여 136.8㎡이다

 

마지막으로 도열병균 레이스 검정 온실은 니가타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작물의 병해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재배조건이나 약제의 종류 및 처리 시기 등을 바꾸어 재배한 작물에 병원균을 접종하고, 발병 상황을 조사하여 보다 효과적인 방제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실외에서는 봄철과 가을철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육묘기(育苗期)에 발생하는 병해 실험 등도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연중 실시할 수 있다. 또한 2005 년부터 니가타현 내에 도입된 품종인 고시히카리 BL을BL 이용하는 데 있어 니가타현 내에 어떤 종류(레이스)의 도열병균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는지를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니가타현 내에서 수집한 도열병균을 레이스 판별용 품종 균에 접종하여 균의 레이스를 조사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 고시히카리는 키가 다소 크기 때문에 태풍에 넘어가지 않게 시비를 조절하여 키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과 도열병 등에 강한 고시히카리 BL13(2년 전)까지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시히카리의 과잉 재배로 인하여 신품종 신노스끼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사실도 알았다. 쌀을 주식용, 국수용, 빵용, 술 주조용, 사료용 등 다양하게 선택하여 제배한다고 설명했다.

 

또 하나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우리는 벼 수확 후 벼로 보관하지만 일본은 현미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수매 시 등급 판정도 현미로 한다고 하면서 먹기 직전 정미로 도정해서 밥을 짓는다고 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품종을 비교하여 설명을 듣고 질문을 많이 하여 궁금한 점들을 순서대로 해결해 나갔다. 연구소 직원들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근면 성실하게 제복을 입고 전투에 막 나가는 사람처럼 직무에 충실히 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 이탈리아 켄으로 들어왔다. 이 호텔은 약 140년 전에 설립되어 3대에 걸쳐 내려오고 있으나 시설물이 새 건물처럼 깨끗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두드러진 곳이었다. 현재는 증손자가 경영을 맡고 있다.

 

 

 

(사진 4,5: 호텔 창업자와 현재 경영자인 증손자)

 

우리는 석식 후 다시 모여 분임토의를 했다. 나는 오늘 방문한 연구소 및 작물연구센터에 대한 단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팀원들과 동행하여 인근 술집으로 들어갔다. 팀의 단합을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일본의 밤은 어두침침하였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전등불도 일찍 꺼져 버렸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전기를 절약할 요량인가 생각했다. 그들의 절약정신은 몸에 베여 있었고 그것보다 ‘밤은 밤다워야 한다.’는 평범한 논리가 깔려 있었다.

 

거리에는 차들이 없었다. 차고지 증명이 있어야 차를 출고할 수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차고로 들어가고 거리는 질서 정연 했다. 차번호를 살펴보니 그린 색상은 영업용. 흰색은 자가용, 그리고 노란색은 경차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고급차는 거의 보이지 않고 경차가 굉장히 많이 눈에 보였다.

 

 

집은 고층건물이 없고 거의가 2층 이하 박공형으로 작게 설계된 집이 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안전한 집을 짓고자 하는 목적이 있지만 이외의 소박함에 의아했다. 집에 들어 가보니 화려한 구석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상데리아 등 고급 등기구도 보지를 못했다. 지진이 일어나면 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람들이 다칠 염려가 크니까 그럴 것이다.

 

거리에는 붉은 색칠을 한 급수전이 많이 있고 집안에는 방마다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어 그들의 안전의식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 연구소 방문 후 오는 길에 건설현장이 보여 유심히 관찰하니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철저한 안전관리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에 와서 가장 궁금한 것이 있어 한국교포 2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찌하여 일본에는 담장이 보이 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도둑이 없으니까요.

도둑이 없으니 담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제야 어릴 적 우리 어머니가 본인을 앉혀놓고 훈계하면서 교육하시면서 하던 말씀이 이해가 된다. “일본에는 길을 가다가 보석이 떨어져도 자기 것이 아니면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절대로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마라.”라고 강조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급한 일로 세워 놓으면 내일도 모래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하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선술집에 들어가 화합을 다지는 시간을 가지고 룸에 들어오니 새벽 2  주변은 고요한 밤 그 자체였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날이 밝아오는 시간을 기다려 운동복을 갈아입고 거리를 나섰다. 다소 피로 하지만 일본의 여려 측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호텔과 접한 측면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다름 아닌 납골당 시설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혐오시설이라고 난리를 쳤을 텐데 일본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문화였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진 6:)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유골은 집 근처 납골당에 안치하는 데 한기에 2,500엔(2,500엔(우리 돈 2,500만원내외) 한다고 알려 주었다.

 

납골당 사원을 통과하여 거리를 산책해 보니 여기저기 비슷한 시설이 보였다. 그리고 거리는 깨끗하고 차들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어도 철저하게 정지선을 지켰다. 이슬비가 내려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 장소로 갔다.

 

밥을 먹으며 고시히카리 쌀 맛이 참 좋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음식도 간결하면서도 맛이 있었고 식사 후 설거지하는 사람을 배려하여 한 그릇에 담아 식사를 하는 세심함이 보였다. 종업원들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그리고 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수치로 여기는 좋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07:30분경 다음 방문지로 이동했다.

우리는 아사히 농업법인에 도착했다.

아사히 농업법인은 200716명으로 설립되었으며, 주요 작물재배로 고시히까리 쌀 품종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회사이다.

평균 55세의 조합원들과 3535 핵타의 면적을 통해 발족된 아사히 농업조합법인은 설립 후10년이 지났으니 현재 65세의 평균 연령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 영농후계자의 육성이 시급한 현안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95%를 고시히카리를 재배하였으나 현재 소비가 줄어 60%를 생산하고 있으나 유동적으로 조정한다고 했다. 왕겨는 공사장에서 일부 사용하고 볏짚은 캇터를 하여 토지개량용으로 전량 사용한다고 말했다.

선별기를 도입하여 쌀의 품질을 1등급으로 높이고 6년 전부터 쌀이 남아 영업활동을 하여 그 돌피 구로 싱가포르에 쌀을 수출하는데 내년에는 쌀 수출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에코팜, 즉 환경 친화적인 쌀 생산을 추구하며 비용을 줄여 이익을 내는 알찬 경영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농약 화학비료도 50%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벼를 심고 수확하는 것은 공동으로 하고 병충해 방제를 위한 농약 살포와 시비 등은 개인별로 하는 시스템이다.

무조건 큰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장비로 가동률은 높이는 실용적 경영을 하고 있었다.

조합을 결성하고 위탁경영을 하는 형식이며 신뢰를 바탕으로 지역 주민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들은 뭉쳐 있었고 항상 해결책을 찾아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아사히 농업법인에서는 무엇보다 청결과 정리정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진 7:)

 

공구는 가지런하게 정돈되고 기계에는 흙 한 점 없이 반들반들하게 닦고 기름치고 하여 새것처럼 관리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는 장비를 정비하고 정리정돈을 철저히 하는 것이 관행이라 했다.

어떤 때는 일하는 시간보다 장비를 정비하고 정리 정돈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말했다.

 

다음은 야 미나미 농장을 방문했다. 이 농장은 레이호 요네야마와 가리와 구로히메 야마에 끼워져 있고 풍요로운 대지, 청아한 공기, 용솟음치는 청류, 풍부한 자연에서 혜택을 받은 수상 촌락에 있다. 수상 촌락에도 해마다 인구가 계속적으로 줄고 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 장래를 보장하는 농업을 확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 대표이사가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농가가 되어 ‘촌락의 농업을 지키자.’라는 것이 야 미나미 농장의 시작점이다.

이 농장은 니가타현의 카시와자키 시에 위치해 있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찾아온 곳이다. 오는 길에 산을 보니 산마루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고 7부 능선까지는 울긋불긋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길가에는 측량기구 폴대 같은 것이 길게 연결되어 박혀 있었다.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겨울에 눈이 너무 왔어 운전자가 눈이 온 깊이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라 한다.

 

산의 나무들은 우람하게 자라 있었는데 피톤치드 성분이 있어 건강에 좋고 건축용 자재로 사용된다고 한다. 일본말로는 히노끼 나무라 하는데 관찰해 보니 편백나무다. 1년에 1 센티미터 정도 자란다니 50년 이상 되어야 제대로 사용이 가능하다. 일본은 50년 수령은 많고 400, 500년 수령의 히노끼 나무도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성에 나무 선각자가 집중적으로 편백나무를 심었는데 약 40년의 수령이 된다고 들었다.

 

이 농장의 대표는 2세 경영으로  40세 남짓한 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마중을 나왔고 어느 폐교로 안내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중식을 해결하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 학교는 일본도 출산율 저하로 농촌 학생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여 12년 전  학생들이 없어 폐교하여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학교 출신인 젊은 대표가 시 당국자를 찾아가 애절하게 건의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제가 다닌 추억의 학교입니다. 수년 후에도 저 학교에 다닌 것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폐쇄, 철거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여 받아 들어져서 지금은 농촌공방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8:)

 

마치 1960년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 구조와 비슷하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복도에는 추억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9:

 우리는 향토 시골 풍취가 풍기는 그곳에서 직접 재배한 메밀로 요리한 메밀국수로 중식을 먹었다.

참 맛이 있었다. 보통 외국에 나가서 음식을 소리 내어 먹으면 미개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등 뒤에서 욕하는데 일본의 문화는 소리 내면서 취식해도 괜찮다고 일러 주었다. 여기저기 쭉쭉 빨아먹는 소리가 들린다.

 

야마나미 유한회사는 테니스 선수를 꿈꾸는 평범한 젊은 사람이 경영하지만 배울 것이 참 많은 농장으로 나는 회고한다..

우선 농촌이 담긴 강한 정신력과 지역 주민들과의 화합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110 핵타를95%를 임대로 임대하여 집행하고 지역 주민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농지를 확장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지역주민의 발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해결책의 방향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어려운 농촌의 실상에서 남을 먼저 배려하는 정신, 지역민을 먼저 배려하는 정신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이 농장도 역시나 청결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농장 안에 트랙터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 들리어 가서 살펴보았다. 다름 아닌 내년도 못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트랙터는 가장 늦은 저속으로 가고 있었다. 땅을 다지고 수평 작업을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모판은 비닐하우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을 고려하고 튼튼한 모종을 자연 생장시킨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우리는 트랙터로2회에 갈지만 이 농장은 1회에 거칠게 갈아서 산소공급을 잘 되게 하여 뿌리가 튼튼하게 하는 일종의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농사를 하고 있다. 촉이 나는 시기까지는 부직포를 덮어 놓아 보온을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 농장의 또 하나의 특징은 종업원이 임금 문제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운영한다는 점이다.

 

일 년 365일 가동하는 것이다. 통상 11월에서 3월은 농한기로 손을 놓아야 하지만 이 농장은 일거리 창출로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니까 트랙터 연결고리에 제설 장비를 붙이고 시()로부터 위탁받아 눈을 치우는 작업을 하는데 직원들이 모두 자격과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어촌 공사에서나 할 일인 농지정리 구획사업을 이 농장의 구획사업을 샘플로 하여 이 농장에서 다른 지역 농장으로 가서 구획정리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농한기에는 떡을 가공하여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대충대충이 아니라 일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활성화에 노력하여 어린이, 학생들을 초빙하여 체험활동도 시키고 농업도 하나의 직업이고 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각인시키는 6차 산업의 일부분도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누군가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농촌 고령화로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을 때가 가장 힘들고 반대로 아이들이 농촌체험을 마치고 함박웃음을 남길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답했다.

어린 학생들과도 소통하고 공생하며 좋은 농업의 추억을 일찍 인식시키는 일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농장은 부채를 계획적으로 탕감하는 것도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 준다.

결국은 새마을 정신과 유사한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지역주민과의 신뢰가 관건이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농장이 365일 가동하듯이 우리나라도 충남지역 이하는 겨울에도 -10-10도 이상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하우스 시설 경작이 가능하며 복합영농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농촌 활성화와 지역민과의 공생이라는 고민을 해야만 한다. 더 보고 살피고 싶었으나 다음 일정에 쫓겨 젊은 농부와 작별했다. 그는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니가타현 조에쓰 시로 이동하여 후루사또 미라이 농업법인을 방문했다.

 

이 농장은 농업을 통해 다양한  고용 기회를 만들어 지역발전과 식량문제에 공헌하고 다음 세대로 계승되는 고품질 농산물 생산을 도모하고 있다.

2007년 농사 조합법인을 설립하여 약 5252 핵타의 농지를 운영하였으며, 2012년부터 논을 이용하여 노상에서 채소를 재배하였다. 2016년 조합에서 주식회사 형태로 조직을 변경하여 마을 전체 논을 집적하여 11 집락 11 농장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후루사또 미라이가 고향의 미래라는 뜻이다. 깊은 뜻과 걸맞게 이 농장의 사장은 첫눈에 확고한 신념에 불타는 사람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는 사무라이처럼 회사 제복을 입고 끓어 앉아서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우리에게 농장의 실태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사진 10:)

 

그를 보고 느낀 것이 있다. 일본인은 검소하고 근면하고 성실하며 특히 ‘~척하다.’를~척 하다. 절대 하지 않는 점이다.

잘난 척,, 많이 배운 척, 건강한 척을 절대 하지 않았다.

 

10년 전

고령화가 진행되고 작업은 모여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쌀과 콩은 3월에서 10월까지만 재배하고 그 이후는 생활보장도 없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그 기간에 다른 도시로 가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서 농사철이 되면 다시 모여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6년 전, 농한기의 탈출구로 하우스를 설치하여 토마토를 재배하고 겨울에도 잎채소를 재배하여 일을 계속적으로 함으로써 매상을 하고 수익을 창출했다고 했다.

 

이어서 블로코리와 논에서 풋고추 등을 생산하여 쌀과 대두를 주력으로 생산활동을 하면서 부가적으로 다른 품종을 재배하여 수익 창출을 했다는 것이다. 올해는 당근과 생강을 시험재배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항은 일본의 농협은 우리나라 농협처럼 동리 별 단체 수매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한 포기의 배추도 그것이 할머니가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 가지고 나왔던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수매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받아 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균등하게 수매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나라 농협이 배우고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농장에서는 년 중 농업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생산 종목을 스스로 찾고 판로도 스스로 개척한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다른 기관에 기대거나 혹은 농협이 아닌 제3의3 거래처를 개척하는 정신이 놀랍다. 내년에는 실수요자와 계약재배로 생산량의 90%를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록 관리하고, 젊은 근로자는 모바일로 기록 저장하며, 심지어 일용직은 작업지시를 배부하고 일을 마친 후 수거하여 모니터링을 통하여 다음 해에 수정하고 시정할 것은 시정해서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인상적이다.

 

이 농장은 일반농가와 차별화한 기술로 쌀 등 을 생산하고 하우스 시설재배로 1년 내내 수입창출 활동을 하고 판로를 직접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농장은 정부의 직접직불금 이던지 아니면 변동직불금이던 정부 보조금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생 노력을 한다는 점이다.

어차피 내년도부터 일본에서는 쌀 생산조절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쌀은 직불금 등 보조금 제도가 전면 폐지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후계자를 육성하는 차원에서 젊은 청년 귀농인을 영입하여 직책을 부여해서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시키는 것이 감동적이다.

특이한 농법은 로터리 작업을 거칠게 1회만 하여 뿌리의 산소공급을 원활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이 농장의 사장은 농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고 자조 자립의 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오늘의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도야마현 우나즈키 그랜드 호텔로 이동했다. 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일부러 화장실에 들어가 보았다. 깨끗했다 그러나 시설은 우리나라 휴게실과 비교했을 때 음악까지 흘러나오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화장실이 최고라 여겨졌다.

 

주차장에는 경차가 즐비하고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를 통행하고 주차공간이 따로 있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

차에 오르면서 기사가 일일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기에 나도 기사에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그를 보니 무엇인가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은 기록 문화라고 하더니만 기사는 하루 일과를 차곡차곡 기록했다. 어디서 출발하여 몇 시에서 몇 시까지 운행하고 어디서 쉬고 주유는 얼마를 하고 차량 점검은 이상이 없었고 등 깨알 같이 기록하는 것이 운전보다 훨씬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 밖을 응시하며 잘 정돈된 농토, 나지막한 집들을 보며 많은 것을 관찰했다.

 

(사진 11:)

2시간을 달렸는데 고속도로 통행요금이 132,000원이 나왔다. 우리보다 엄청 비싸다. 물어보니 통상 일반물가도 비싸고 한국보다 3배나 비싼 가격도 있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일본은 퀵서비스 제도가 없다고 했다.

 

어느 학교 앞을 지나갈 때 나는 학생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학생들의 모습과 태도가 우리나라 학생들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 길이는 분명 무릎 아래 15cm까지 덮어 있었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남학생도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었는데 두발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 학생은 하교를 하면서 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며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학생들과 비교하는 것은 자제해야겠다. 그냥 어딘지 모르게 확실하게 틀린다는 점만 언급한다.

우리는 정해진 호텔로 들어가 석식을 해결하고 다시 분임토의를 했다.

나는 말하는 것보다 경청하는데 무게 중심을 두었다. 그리곤 또 팀원들과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이곳은 온천지대라 나는 일본식 의복인 유카타를 입고 당당하게 온천탕에 들어갔다. 나는 누군가 유카타를 입을 때는 맨 몸에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유카타를 걸치고 끈으로 허리를 두 번 돌려 태권도 도복을 입듯이 끈을 매고 게다를 신으면 된다.

단지 입을 때 주의할 점은 우리나라 복식 예절에도 한복을 입을 때 좌임(左袵)과 우임(右衽)이 있는 것처럼 왼쪽 옷섶을 오른쪽 위에 올리고 끈을 돌리면 된다. 반대로 할 경우 죽 은자가 입는 옷이 되어 뒤에서 낄낄거리고 비웃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온천물에 들어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노천탕으로 이동하니 찬 기운을 느낀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404 호호 룸으로 돌아와 안동에서 온 젊은 농부와 캔 맥주를 마시며 한국의 농업과 6차 산업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구로베 협곡 탐방/옛 마을 거리

 

06:00시 일어나라는 모닝콜이 울렸다. 창문을 여니 산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장관이다. 설국에 온 것 같다.

여기는 도야마현 구로베(黑部) 시이다.(黑部)시이다. 온천지대다.

 

(사진 12:)

 

아침을 먹은 후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척에 있는 구로베 협곡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에서 가장 험준한 V자 협곡 사이로 댐을 막고 전력 생산 자재를 옮기기 위하여 건설된 선로다. 공사가 완료되고 여기서 생산된 전력이 오사카까지 간다고 한다. 그 후 이 철로는 철거 대신에 관광선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폐광지역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는 없는지 이것을 보고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우나즈키 역에서 탑승하여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도롯코 열차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산마루에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먼저 진홍 철교 신야마비코 다리가 보였다. 열차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온천마을에 울린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바로 큰 댐이 보인다. 2001년에 완성한 댐이다. 홍수 조절과 발전을 목적으로 축조된 댐이다.

 호반에 선 로마의 오래된 성같이 보이는 신아나 기가와 라 수력 발전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 13,아름다운 산과 댐)

 

 조금 지나니 멀리 철사로 연결된 이상하게 생긴 좁은 현수 다리가 보였다. 우나즈키 호수 위 15m 정도의 높이에 설치된 이것은 야생 원숭이를 위한 인간의 배려다. 원숭이들이 건너편 강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측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로베 강 옆에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선 석불을 닮은 모양의 호토 게이시 천연바위가 보였다.

 

플랫폼 일부가 구로 나기 강에 걸린 구로나기 역을 통과하니 그다음으로 높이 60m 길이 64m로 연선에서 가장 깊고 험한 계곡에 놓인 다리다. 오래전 입산자가 너무나도 계곡이 깊어 뒷걸음질 쳤다는 것이 아토비 키다리의 유래다. 이어서 구로 나기 온천이 보였다. 1645년에 발견된 온천으로 산기슭의 우나즈키 온천의 원천이다. 큰 노천탕은 당일치기 온천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조금 더 오르니 높이 200m인 네즈미 가에시 암벽이 보인다. ‘고양이에게 쫓긴 쥐도 오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위압적인 대 암벽이다.

 

사방의 산들이 모두 아름답다. 눈과 단풍이 조화를 이루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여섯 개의 봉우리가 자웅을 겨루듯 솟은 다시롯포 바위산이 보이고 이어서 어느 산 보다 먼저 눈 단장을 한다고 하여 ‘사키가케산’이라 불리는 산 나비 키산이 위용을 자랑한다. 이어서 히가시가 네 쓰리산이 보였다. 이 산은 산 전체가 정질 석회암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위산이다. 그다음은 가네쓰리 삼존상이다. 구로베 강의 범람을 막고 홍수로부터 하류에 있는 집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안치시켰다고 전한다.

열차는 가네쓰리 역에서 정차했다. 이 역은 일본 내에서도 진기한 ‘스위치 백’을 체험할 수 있는 역이다.  우리는 이 역에서 하차하여 건너편 강가에 내려 쌓인 눈이 티라미스처럼 보이는 구로베 만년설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며 천천히 걸어서 가네쓰리 강변으로 내려갔다.

 

가끔은 곰이 나타난다고 역무원이 말을 하는데도 무서운 줄 모르고 자연경치에 감복하고 강물이 흐르는 강가에서 폴폴 김이 솟는 신기함에 정신 줄을 놓았다. 손을 넣어 보니 정말 따뜻한 온천물이 느껴진다.

 

조금만 더 가면 또 하나의 고아 다이라 댐이 보이고 바바 다니 강이 보이며 여러 개의 이름 없는 외진 온천과 족탕을 즐기는 장소도 있다. 강폭이 좁고 옛날 원숭이가 뛰어넘었다 하여 이름 지어진 사루토비 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정말 좋다.

 

 

(사진 16,17,18: 단풍과 산 그리고 댐)

 

그다음에는 구로베강 본류에 놓인 주철 다리 오쿠가 네 다리가 보이는데 34m 높이의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절경 중에 절경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벌린 입 같은 아주 박력 있는 암벽을 접하는데 그 이름처럼  사람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는 히토구이 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어떻게 대자연 속에 이렇게 온천이 많은지 참으로 신기하고 의아스럽다.

 

 

우리는 다시 열차에 몸을 싣고 역행하여 우나즈키 역사로 되돌아왔다..

흐르는 맑은 물과 단풍이 물든 산을 바라보니 연수중 강행군의 피로는 풀어지고 마음이 상쾌해졌다..

 

다시 호텔에서 대기한 차에 탑승하여 보쿠 시 도오리(옛 마을( 거리) 문화탐방에 나섰다.

보쿠 시 도오리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옛날의 그 시대로 달려갔다.

여기는 유자와 우오누마 지역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열어 통치를 시작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기까지의 에도시대(江戶時代) 에도(현재의 도쿄)를 연결하는 수송로를 따라 역참 마을(宿所)로(宿所) 번영해 온 곳이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지역주민들이 그 역사와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재현의 노력을 한 결과 2011년 도시경관대상, 2015년 아시아 도시경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설국의 구전’을 재현한 사마귀 오브제와 세련된 카페들도 있다.

 

(사진 19,엣 마을 거리의 모습)

나는 비 오는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엣 거리를 살펴보았다.

에도시대 거리를 복원한 상점가가 우리나라 민속마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거리에는 옛날 이발소, 음식점, 양조장,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에도시대 농민들은 오공 오민,, 육공 사민이라 해서 전체 수확량의 50%~60%는 영주들이 세금으로 거두어 가서 생활이 궁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농민봉기 횟수가 무려 3,000회라고 하니 미루어 짐작이 간다. 영주는 혈세를 받아 큰 저택에서 부를 누리고 반대로 평민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조선통신사 신유한 등이 기록으로 남겼다.

 

 

 

 

. 선도경영체와 총영사 관저 방문

 

우리는 잠시 후 시간에 쫓겨 키노 메 자카 호텔로 이동했다.

이동 간에 차에서 우리나라 포항에서 5.4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나는 내 고향 안강이 무사하기를 조용히 기원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우리는 또 어김없이 분임토의를 했다. 그리고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었다. 이튼 날 아침 서둘러 다음 방문지로 출발했다.

 

오늘은 니가타현 토카 마치 시에 있는 삼가 무라 조합 법인부터 방문하였다. 삼가무라 법인은 20091월에 설립되었으며, 3개의 촌락이 합쳐진 26 농업 가정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의 법인이다. 수 많았던 농민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농지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줄게 되는 위기의식을 통해 조합 법인이 탄생한 것이다.

눈 내린 미끄러운 비탈길에 차를 세우고 농장에 들어갔다. 펀 백 나무 향기가 참 좋다.

 

(사진 21:)

 

10여 년 전에 큰 지진을 겪은 곳이라 건물은 두꺼운 철골로 단단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 건물도 그 당시에 피해복구비를 지원받아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 농장에서는 오리지널 고시히카리를 재배하여 인터넷 판매 등으로 수매가의 다섯 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했다. kg7,000원에 판매하니 수익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농혼을 담아 특수한 살을 생산하면 경쟁력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 농장에서는 건조기로 건조를 하고 현미로 포장을 하는데 홍백 색상을 넣어 독특하게 포장하여 답례품용 등으로 판매를 하며 친환경적으로 재배하기 위하여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양과 염소를 키워 비탈면의 풀을 가축에게 먹이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4개 마을이 있었지만 고령화와 탈 농촌 현상으로 1개 마을은 없어지고 현재는 3개 마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역시 이 법인에서도 겨울에는 트랙터에 제설 기구를 연결하여 제설작업을 위탁받아 시행하여 수익을 올린다고 했다.

 

(사진 22,23:)

 

우리는 다시 조심스럽게 차에 탑승하여 니가타현 쌀 정보센터로 출발했다. 역시 매우 친절했으며 작별인사는 문밖에 서서 우리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니가타 쌀 정보센터로 이동하여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필요한 질문을 하여 의문점을 해결했다.

이 정보센터는 니가타현과 관계 농업단체가 일체가 되어 운영하고 있다. 쌀 관련 새 정책 정보나 쌀 정책 기본정보, 수급 유통정보, 재배기술정보, 현 농업 재생 협의회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3층 회의실로 들어서니 단순하면서도 잘 정리된 회의실이 있었다. 회의장에는 니가타현 식량 담당 공무원 다키자상과 센터 직원이 자리를 잡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요점은 2018년부터 쌀 보조금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조금 대신 융자로 전환하고 농업인 본인 스스로 알아서 고품질의 쌀, 팔 수 있는 쌀을 생산하라는 내용이다.

1인 가구 증가 등 전반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로 주식용 쌀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어떻게 수급조절을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비자는 맛이 좋은 쌀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고시히카리 쌀도 더 맛있게 생산하여야 판매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농민들은 다른 가공식품 생산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고 남은 농지는 다른 작물과 사료용 재배 등으로 국가 생산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그 복 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은 내년부터는 일본의 농업정책이 확 바뀌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탑승해서 구보다 농기계 회사로 출발했다.

그 회사는 어느 산업공단에 있었는데 여기도 담장은 없고 낮은 조경수를 심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 농기계의 대표적 생산 업체는 이세끼(ISEKI), 구보다(KUBOTA) 얀마(YANMAR)이다. 앞서 방문한 농장들도 거의 3개 회사의 농기계를 신품 혹은 중고로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들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구보다 농기계가 정비를 하고 있다.

잘 정돈된 기계들이 질서 하나는 철두철미한 일본인들의 사고를 대변하듯이 오열이 칼날 같았다.

 

(사진 24:)

 

공장 내를 자유 견학하면서 사무실을 잠시 훔쳐보았다. 역시나 가지런히 열과 선이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제복을 입고 근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약속 시간에 쫓겨 방문을 종료하고 초청을 받은 한국총영사관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높은 빌딩에 들어갔다. 총영사관저택은 19층에 있었다.

조건희 총영사는 출입구에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준비된 차와 다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총 영사는년간 일본에 근무하면서 고시히카리 쌀밥을 먹었는데 식은 밥이 더 맛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 1인 가정 증가, 탈농현상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게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한 일 간 공동연구를 통한 대안 마련과 우호증진이 필요하다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좌담회를 마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고 다시 대회의실로 모여 종합적인 토론회를 열었다.

어떤 사람은 발언권을 얻어 글루텐 함양, 건조온도 등 핵심 기술은 말하기를 꺼려하더라고 토로했고,, 쌀 품종의 표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나는 일본 연수 국외훈련에서 기술을 배운 것도 중요한 성과지만 그보다 더 일본 농민들의 자립 자조 정신을 배웠다고 개인적인 소견을 강조했다.

 

 

(사진 25:)

 

그날 밤 팀원들과 호텔 밖에서 화합의 시간을 보내며 일본문화를 체험했다. 특히 느낀 것은 우리나라는 기본 반찬 등 많은 종류의 음식으로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가 많이 나오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일본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시켜서 깨끗이 비우기 때문에 그 량이 월등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그 이튼 날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후로 사토 바자르관으로 이동했다.

짐을 싣는 일과 운전은 연세가 지긋한 드라이버상이 했는데 우리를 안전하게 이동해 주시고 장시간 운전으로 피로하실 텐데 내색하지 않고 보여 주시는 그 따뜻한 친절함은 내 기억 속에서 잊을 수가 없다. 차에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차 안 의자에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쓰레기를 남겨도 불평 없이 깨끗하게 치우고 우리를 맞이했던 완숙한 인격자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호텔을 나서는데 3대째 여주인이 기모노를 입고 출입문 밖에 나와 역시 우리 일행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며 아쉬운 작별의 정을 표했다. 바깥공기도 찬데 말이다.

 

후로 사토 바자르관은 많은 특산물이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와 유사한데 바로 옆에는 일본 문화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어 천천히 살펴보았다.

우리와 달리 포장단위가 소포장이 많다는 점이 확실하게 달랐다. 쌀을 예로 들면 우리는 10kg, 20kg 등이 주로 팔리지만 일본에는 500g 등 소포장에 포장도 색상을 넣어 답례품으로 선물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핵가족화의 영향으로 배추도 2등분~4등분으로 쪼개서 팔고, 대파도 1~3개로 포장하여 팔았으며 과일도 아주 적은 단위로 파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 이러한 사례는 바로 우리 시장에도 곧 전이될 것이라 생각된다.

 

 

(사진 26,27,28:, , 쌀의 진열)

 

박물관에는 조상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1~3층까지 부스마다 입체적으로 잘 설치해 두었다.

 

 

(사진 29: 우리나라와 유사한 옛 조상의 생활)

 

우연히 창밖을 보니 아름다운 연못이 보였다. 그런데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물고기가 하늘 쪽으로 1m1m 이상 뛰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혹 지진의 전조 증상은 아닌지 하고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강행군을 통하여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훈련 단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니가타 공항으로 갔다. 일본은 테러 때문에 단체수속은 금지하여 출국 수속을 개인적으로 마치고 기내에 탑승했다.

잠시 후 대한항공 KE 764기는 니카타 공항을 이륙하여 안전하게 인천공항에 착륙시켜 주었다.

 

 

. 니가타 국제 식량상 소개

 

나는 대한민국 총영사로부터 국제 식량상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우리 안강 평야에서 농사를 짓는 농업인 중에 수상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내용을 게재하며 올해 아니면 내년 혹은 그다음 해를 기약하고 싶다.

 

1. 니가타 국제 식량상 제정 취지

니가타는 열악한 여건을 이겨내면서 식량 증산 및 개선에 앞장서고 있는 일본 유수의 식농(食/農)(食/農) 모델도시로서 식량분야의 국제적 공헌이 있는 개인 또는 단체를 선발하여 지역을 조명하고 표창하여 국제 식량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 위해 니가타현내 민관산학 분야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협력하여 제정함.

 

 

일본 유일의 식량분야 국제상으로 니가타 지역 농업환경 개선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노 토 자부로를 기념하여 재단을 만들고 제2의 사노 토자부로 탄생을 염원하며 2010년부터 격년으로 시상 중임

 

과거 니가타시는 저습지대에 위치한 수렁논으로 경작에 상당한 애로가 있었으나, 사노 토 자부로(1923~1994)씨가(1923~1994) 이러한 환경을 개선, 수렁논을 일본 최고의 쌀 재배 논으로 개량하는 데 성공함.

 

뿐만 아니라, 사노 토 자부 로씨는 니가타 논 개량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흑룡강성 ‘삼강(三江)’ 평원의 식량 증산에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짐.

 

2. 평가 기준

세계적/지역적/개별적 시도나 활동으로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업적일 것.

새로운 발견이나 개발 등 장기 지속형 시도로서 인류 생활 향상에 기여하고 국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이 있을 것.

실적, 지명도가 낮더라도 장래성이 있을 것.

 

3. 수상 내역

대상: 1, 상장 및 기념 공예품, 상금 1,000만엔(1,000만 엔(우리 돈 1억원)

시노 토 자부로 특별상: 1, 상장 및 기념 공예품, 상금 200만엔(200만 엔(우리 돈 2천만원)

21세기 희망상: 2건 이내,건이내, 상장 및 기념 공예품, 상금 100만엔(100만 엔(우리 돈 1천만원)

 

4. 수상자 자격

국적, 성별, 종교 불문, 생존자로 한정

각국 정부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자나 기관 본래의 임무 수행 일환으로 달성한 업적은 원칙적으로 비대상. , 업적이나 공헌이 기관의 기본적 임무를 초월하여 현저한 경우는 예외

 

과거에 다른 국제상(노벨상, 국제 식량상, 일본상, 교토상 등)을 수상한 적이 없는 개인 또는 단체.

 

5. 시상식

201811, 니가타시에서 개최될 예정

 

6. 추천/응모방법

추천/응모기간: 2017.09.01.()~12,25()

추천서 송부: 추천서를 전자양식 또는 우편으로 송부

송부처: 동 재단 사무국(http://www.niigata-award.jp)

 

. 맺음말

 

나는 고향이 안강이지만 현재는 대구에 거주하면서 퇴직 후를 생각하여 청도 등에 소규모 농지를 보유하고 귀농을 은근히 꿈꾸며 쌀 생산, 과수재배, 경제수목, 조경목(느티나무)조경목(느티나무) 식재 및 관리, 곤충사육(3: 밀웜, 귀뚜라미, 고슴도치, 미니피그, 악어거북 등 파충류 포함) 그리고 6차 산업 분야 등 농업의 다각화 방법을 남모르게 조금씩 연구하며 미미하지만 지속적으로 용감하게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 농업 선도경영체 방문 국외훈련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5박65박 6일간 동행하면서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자평하고 싶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의식에서 잠시 벗어나 실재 상황을 직시하면서부터 비판과 부정적 시각에서 상당한 변화를 일으킨 것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특히 질서와 청결, 정리정돈, 철두철미한 안전의식, 그리고 일본 농민들의 자조 자립 협동정신이 확실하고 농민들이 정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고 자기와 자신들의 법인보다 지역주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농혼을 엿보았다.

 

그리고 투명한 일본 농협의 긍정적인 역할이 어려운 농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는 촉매제 역할은 한다고 판단된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 1인 가정 증가, 생산량 조절 실패 등의 문제는 우리나라가 처한 농업의 과제이다.

어제도 전북 고창의 한 농민이 배추와 무값의 폭락에 반발하며 탐스럽게 자란 배추를 트랙터의 칼날에 잘게 부서지게 하여 바닥에 흩날리게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안강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인가 추수할 벼를 트랙터로 갈아엎은 사건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농업이 성장하는 좋은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사진 31:() 한자를 디자인 한 옷)

 

 

 

 〈참고자료〉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민음사(), 2002

이경남 역,, 한국교육출판공사한국 교육출판 공사, 1986

다나구치 지로, 『에도 산책』, 애니북스, 2014

김숙자 외,, 시사일본어사시사 일본어사, 2016

기타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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