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언덕을 넘어...

 

조용히 눈을 감는다.

조기전역 후의 참혹했던 인생의 한 단면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차디찬 쓴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그 때는 허허벌판에 추락한 다리 없는 달팽이 신세 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전혀 몰랐다.

 

필력이 둔하여 굴곡진 한 인생의 단면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본인이 체험한 지나간 일들을 진솔하게 반추(反芻)해 보고자 한다.

 

마치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오듯이 절망은 어느 순간 희망으로 변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 했다. 전역 2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렴풋이 깨달았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에 있을까?”라는 시인의 글귀처럼 바람이 불어 나무 가지를 흔들어야만 뿌리의 물이 공급되어 알찬 열매가 열린다는 평범한 사실을 사람들은 흔히 간과(看過)한다.

자신도 같았다.

 

1990 7 무더운 여름 어느 , 나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계급정연으로 푸른 군복을 벗었다.

막상 전역신고를 하고 부대정문을 나서는 순간 솔직히 뜨거운 눈물이 발끝까지 흘러 내렸다.

억울했다.

참으로 어중간한 15 복무의 갑작스런 이직은 암담함 자체였다.

 

아내와 아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뿐만이 아니다. 부가하여 연노하시고 병마에 시달리시는  부모님을 봉양할 책임도 메여져 있었다.

막막했던 때의 심정을 아마도 평생 잊을 없을 같다.

 

 

그날  저녁노을이 지는 금호강 둔치에서 조약돌을 밟으며 말없이 걸었다.

소화불량으로 밥을 먹을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스스로 매질을 가하고 있었다.

“넌 패배자다. 아니 낙오자야!”직설을 부으며 가혹하게 학대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깨는 늘어지고 오직 절망의 아픈 상처가 요리조리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로등 불빛을 올려 쳐다 보았다.

수많은 하루살이 벌레가 원을 그리며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스르르 주먹을 쥐었다.

 

하찮은 미물도 불빛을 찾아 저렇게 힘차게 날고 있는데 하물며 사나이 대장부가 이런 일로 의기소침해 불행의 나락으로 스스로를  함몰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부터 철두철미하게 살자. 어느 누구도 인생을 대신 사람은 없다. 죽더라도 날아나 보고 죽자. 다짐하고 다짐했다.

 

절체절명(絶體絶命) 순간에 작은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그것을 바로 행동에 옮겨 희망의 나무를 심는 계기를 만들었던 셈이다.

 

인내하고 노력하는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나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있어야 된다고 판단하여 잠재능력 배양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전역한 바로 ,  경북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경영학을 배웠다. 자영을 하더라도 기본을 알고 접근 하려는 심산이었다.

 

 

우선 아내와 의논하여 효신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문구점을 열고 보다 일찍 이어나 새벽부터 준비를 하여 등교시간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판매활동을 다음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대구 중구청에 위치한 바르게살기운동 중구협의회 사무실로 출근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퇴근 때는 도매점이 모여 있는 칠성시장에 오토바이로 이동하여 백미러가 가릴 정도로 짐을 가득 싣고 점포로 가서 일했다. 다음은 오토바이로 골목길을 재빠르게 이동하여 대학교 공터에 주차하여 핼멧을 벗고는 강의실로 달렸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기동력으로 점포로 이동하여 밤이 늦도록 녹초가 되도록 일했다.

 

당시를 회상하면 비록 몸은 지치고 피로하였지만 수입도 짭짤하였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이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으로 생활한 2 지난 시점에 시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포가 활성화 되자 임대인은 과도한 임대료를 요구 했다. 주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점포를 인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회초년생으로 세상살이가 열심히 한다고만 해서 미래가 열릴 정도로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할 있었다.

 

지친 몸과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틈도 없이 아내는 다시 수예점을 열었다.  나는 생활을 함께한 상관의 추천으로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국립공원관리공단 본부에 계약직으로 채용 되었다. 원하지 않은 기러기 가족이었으나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근무했다. 집체교육에서는 토지수용에 대한 교육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 하지만도 평화로운 시간은 잠시 2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구조조정의 태풍이 휘몰았다.

 

나는 이곳을 2 직장으로 생각하고 정열을 쏟았지만 당시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생의 쓴맛을 보고 다시 서울의 꿈을 포기하고 대구로 복귀하지 않을 없었다.

 

언덕을 넘으니 절벽이 있고 절벽을 넘어서니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적은 돈으로 부모님 봉양까지 헌신적인 희생을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이제 자존심 같은 것은 지나가는 똥개에게 던져 버리고 당장 다음 날부터 좋은 나쁜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중소 건설회사에 취업하여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당시 노조활동이 극렬하여 노조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사원의 업무수행 평가를 수치화하여 구조조정을 하는 악역이 내게 주어 졌다.

 

해고의 고통을 누구 보다 아는 자신이 회사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그런 임무를 수행 때에 심적 부담과 갈등이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인내하고 다독이며 임무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수행하여 회사 경영이 정상화 되도록 나름대로 기여 하였다.

회사를 묵묵히 떠나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슴이 따가웠다. 누군가는 해야 일이지만 총무차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다음의 기분은 하염없이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의논하여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주물을 구입하고 위탁공장에 맡겨 싱크매트를 만들었다. 지하창고도 임대하여 물건을 적재하였다. 차량도 차를 마련하였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나는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아내는 수예점에서 소매를 하고 나는 차량에 물건을 가득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부산의 국제시장에 물건을 일부 내리고 남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순천을 거쳐 광주의 양동시장에 갔다가 남원 중소 도시까지 피로를 모르고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운행 거리가 1,000키로미터가 넘을 때가 많았다.

속도위반 과태료 주차위반 딱지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이 개조 되는 순간인 것이었다.

지구가 둥글 듯이 세상은 너무 딱딱하게 살지 말고 둥글게 둥글게 부드럽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교훈을 그때 배웠다.

전국의 시장은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니고 전국의 백화점과 마트에도 들어가 보았다.

물건은 많이 팔았지만 수금이 문제였다. 울산의 전하시장에서의 사례다.

“사장님! 오늘은 물건대금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내가 독촉하면 “네 다음 월요일 오시면 모든 대금을 청산해 드릴께요.”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에 울산으로 내려가면 사장은 야반도주를 하고 없었다.

허탈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위해서 생겼구나!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와 같이 물건 값도 많이 날렸다. 그리고 제품이 내구성이 있도록 생산하여 마모율이 극히 낮아 구매하면 다시 구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사업은 서서히 어려움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사업을 일체 접기로 결정하였다.

 

 

그렇다고 실망하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어서 공병장교 때의 경험을 살려 건설회사에 취업하여 전무이사로 회사전반의 사업을 총괄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2004 나는 인문학에 대한 포부를 품고 석사과정 선수과목을 익히며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새로운 도전을 했다. 결코 학력 세탁이

아니라 나의 적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제 ! 버는 일에만 신경 쓰고 공부는 포기하세요.”라는 아내의 간곡한 권고를 설득하지 못하고 2006 8 동양철학의 과정을 마치고 논문심사를 통과하여 52세의 나이로 졸업하였다.

 

2007 재직하던 나가던 건설회사가 자금 압박을 받고 휘청거릴 즈음 나는 용기를 내어 사표를 던졌다.

이제 숙달 사회인으로 두렵지가 않았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같은 나는 제일건설 주식회사를 과감하게 창업했다. 그리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다. 결과 관급공사를 수주 받고 새마을금고 사옥신축 등을 도급하여 신명나게 일했다.

 

2010 들어 갑자기 지방 건설 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경성대장염 등이 발생하여 육체적으로 상당이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말하는 우울증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혼자만 아는 1 비밀이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기에 이르렀다.

 

 

“그래 내가 몸이 아프다고 생을 포기 절대 없다. 주절주절 거렸다. 어려움이 닥치면 주저하지 말고 정면으로 대응하여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슬픔을 하도 많이 겪어 내성이 강해 있었다.  이미 멘탈은 어느 누구도 범접 없는 경지에 도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야무지게 운영하던 회사를 매각하고 해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코이카와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해외봉사활동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등록이 완료되어 전문가로 나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비록 낮은 단계라도 지체 없이 실행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한국국제협련단 훈련소에 57기로 입교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프리카 언어인 키스와힐리어를 익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2010 8 인천공향에서 항공기에 탑승하여 두바이를 거쳐 동부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나는 곳에서 현지 주민을 사랑하며 실로 많은 일들을 했다.

새마을 교육은 물론이고 버려진 산야에 그들의 내일을 위하여 망고 아보카도 유실수를 구석구석 심고 가꾸게 했다.

그리고 시골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게와 바소구리, 도리께, 서래, 각종 무지게 농기구를 제작 보급하고 샘을 발견하여 공병장교의 능력으로 파이프라인과 물탱크를 연결하여 급수 모타가 필요 없는 자동 압력으로 구릉지에서도 꼭지를 틀면 곧장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었다.

영양실조의 아이들과 여자들이 머리에 양동이를 이고 산을 넘어 물을 길러 오는 처량한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나는 일요일이면 배낭에 사비로 쌀을 가득 채우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었다.

 

파독간호사 출신인 정숙란선생님과 같이 집집이 방문하고 처참한 환경에 여러 차례  울기도 했다.

죽어가는 말라리아 환자도 14명이나 구했다. 그들은 약을 구매할 돈이 없다. 체온계로 열을 재면 40도가 넘어도 어린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곳에서의 생활에서 스스로 많은 교훈을 얻었다.

결사적으로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중대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요즘도 가슴은 따뜻하고 자긍심으로 충만 되어 있다.

 

2011 해외봉사 활동을 성공적으로 종료하였다. 많이 아팠던 대장염도 우울증도 자연 취유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없다. 하늘의 선물이었다.

내가 귀국하여 국내에 체류할 때에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입원하셨다. 나는 곤충사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700만원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던지 해야만 했다. 열심히 일해서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자력으로 잠시나마 편안히 모실 있었다.

 

 

 2013 3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사감으로 근무했다. 밤에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낮에는 어느 때는 경산 시민회관에서 주택관리사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사로 강연했고 어떤 때는 예절지도사들을 대상으로 병암서원 강당에서 감히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미래를 위해 마련해 가까운 청도 자경소유 농장에 가서 귀촌을 꿈꾸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2017 8월에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본부의 심사를 통과하여 산하기업 이사로 선임되어 사외이사로 활동하며 또한 대구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서라벌 대학교에서 강사활동을 제의했으나 포기했다. 10여권의 책도 공저로 출판했다. 매년 1 이상 원고를 제출하였다.

 

인생은 마라톤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산을 넘으면 하나의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절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누군가 말한 인생지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틀림이 없었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자신이 절대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한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하고 노력하고 보다 진지하게 내일을 준비 하여  오늘과 내일을 진정으로 음미하며 진지하게 살고자 한다.

어제의 아픔은 오늘의 약이 된다.()

 

감사합니다.

 

성명: 손승호휴대폰-010-8591-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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