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楚라는 청년을 이용하여 <사람 장사>를 하려는 큰 뜻을 품은 지 불과 9년 만에, 吕不韋는 이제 天下에 군림하는 권력자权力者가 된 것이다. 

(역시 장사 치고는 사람 장사가 최고였구나. 
나에게 사람 장사의 비법을 가르쳐 준, 두메 산골에서 만났던 70객 老翁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 노인을 만나기만 하면 커다란 감투라도 하나 씌어 주고 싶은데.) 
성명조차 모르고 헤어진 노인이 새삼스러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权力이란 참 좋은 것이어서, 吕不韋가 丞相의 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축하객과 아첨배들이 千客万来하였다. 
그 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혁혁한 선비들도 있었다. 천하의 재사 贤士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 들었다. 
거기 따라 家僮과 奴仆(노복)들도 삼백 명이 넘게 되었고,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侍女만도 백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만큼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吕氏家门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吕不韋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四公子>가 머리에 떠 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 무렵,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王族들은, 天下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宾客(빈객)으로 접대해 오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을 속칭 食客이라고 불렀다. 

그런 식객 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政客도 있었고, 명성이 혁혁한 선비도 있었고, 辩舌이 능란한 论客도 있었고, 심지어 힘이 세거나 도적 솜씨가 비상한 사람도 있었다. 
뭐든지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집으로 모셔다가 융숭히 대접하였다.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고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하게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식객들은 자기 일처럼 각자의 지혜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 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 간의 인간 관계가 同志的인 义理로 결합되어서, 은연중에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울타리 치고는 그렇게 믿음직한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 치고 식객 이삼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齐나라의 孟尝君(맹상군)과 魏의 信陵君, 楚의 春申君과 趙의 平原君등 네 사람은 식객을 무려 3천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 네 명을 <지혜로운 사공자>라는 통칭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吕不韋 자신도 文信侯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사공자>를 본받아, 养客(양객)으로 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 왕조 때에는 엔간한 대감댁에서는 식객을 수십 명씩은 반드시 거느리고 있었고, 특히 大院君은 식객들을 곧잘 정치에 이용해 왔었는데, 그런 풍습은 멀리 중국 전국시대의 사공자들의 유풍을 본받은 풍습이었다.) 

승상 여불위가 养客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한번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志士,贤士, 论客, 学子, 术士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은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거기에 따라 家僮과 奴仆(노복)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아서는 안 될 형편이었다. 养客을 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한다. 

여불위는 워낙 理财에 밝은 사람인지라, 막대한 돈을 써 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그냥 놀려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했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이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 보는 것이 어떠 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야의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孔子는 일찍이 《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일이 있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는 것이 어떠 하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테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책을 한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거든, 책 이름을 《吕氏春秋》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또 여씨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사람 장사>에 속하는 사업의 일부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吕氏春秋》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하여 26권이라는 방대한 부피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착안으로 저술된 史书인 것이다. 

여불위는 문화적인 식견도 그만큼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계속 18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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