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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묘에서 사라진 개화의 꿈(45)
걱정거리는 또 있었다. 개화파의 앞날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개화파의 핵심인물은 누구네 누구네 해도 박영효와 서광범, 그리고 김옥균 자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는 글 잘하고 말 잘하는 데다 머리 회전이 빠른 김옥균이었다. 그들은 1881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면서 개화파 활동을 본격화하기로 결의했고, 이후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핵심인물인 홍영식은 개화파와 뜻을 같이하긴 했으나 정치가라기보다 차라리 행정가였다. 정부의 요직을 맡아 나랏일에 전념하다 보니 한 눈 팔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개화파라기보다 친개화파로서 개화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국정에 전념하고 있어 개화파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그들 편으로 끌어들어야 할 포섭의 대상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양군이 홍영식을 동지로 끌어들인 이유가 있었다. 독립당의 결심은 처음부터 매우 강경함이 있었다. 그들은 독립을 선언하려 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유력한 인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홍영식과 친교를 맺고, 마침내 그를 동지의 한 사람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1883년 통리아문 소속기관인 박문국(博文局) 주임으로 특채되어 한성순보의 발행 업무를 맡았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회고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기까지 김옥균은 세 차례나 일본을 방문했다. 그가 맨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은 그의 나이 31세 때인 1881년 12월이었다. 그는 일본을 유람하고 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근대화 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의 발전 현장을 둘러보는 한편, 일본의 이름 있는 정객과 지식인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일본을 두루 살피는 동안 그가 느낀 감정은 놀라움과 부러움, 울분 등 복합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반면, 조선은 왜 그렇게 될 수 없느냐는 생각에 울분에 잠기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제대로 개화하려면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1882년 8월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3개월 만이었다. 이번에는 수신사 박영효 등과 함께 갔다. 임오군란 직후 조선은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의 사후 처리를 위해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고종은 그 자리에 일본을 잘 아는 김옥균을 보내려 했으나, 김옥균이 사양하며 금릉위 박영효를 추천하자 박영효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김옥균을 고문으로 동행케 했다. 그때 김만식이 부사로, 서광범이 종사관으로 동행했고 민영익이 별도의 명을 받고 그들과 합류했다. 뒷날 개화파의 중심인물이 된 그들은 그렇게 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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