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12일, 박정희와 육영수는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주례를 섰던 대구시장 허억은 신랑과 신부를 소개하면서 '신랑 육영수, 신부 박정희'라고 불러 하객들을 웃겼다.
   
 

육영수는 친구로부터 박정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자기와 이름이 뒤바뀐 상황이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뭔가 운명적인 남자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가난한 농군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 대구사범학교 졸업,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수석 졸업, 일본 육사 3등 졸업, 조선경비사관학교 3등 졸업이란 화려한 경력에 호기심이 발동했고,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위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떠올라 비상한 인물일 거라는 기대감도 들었다. 대지주인 아버지의 축첩에 대한 원망이 7년의 나이 차와 가난이라는 나쁜 조건을 오히려 좋은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 개인 사정도 분명 잠재했다.

영수의 앞에 꼿꼿이 앉아있는 남자는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깡마른 체구에 비교적 작은 키의 육군 중령이었다. 틀은 크지 않았지만 당차고 눈이 살아있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겼다.

“이름이 참 좋습니다. 제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 그런지 저와 인연이 있는 여자는 남자 이름이 많네요.”

박정희는 전처 김호남을 떠올리며 아무 생각 없이 말문을 텄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거의 백발백중 자신의 이름을 갖고 말문을 터는 것에 이력이 난 터라 박정희의 관심 표명이 육영수에게는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 사귀었던 분이 다 남자 이름이었던 모양이지요?”

영수는 다소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말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게 정희에게는 치명적 촌철살인이었다. 순간, 정희는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일시적으로 눈길이 흔들렸으나 곧바로 결심을 한 듯 자세를 고쳐 잡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요.”

“아, 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요, 그냥 별뜻 없이 말했어요.”  

“그 친구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대구사범학교 다니던 중, 아버님이 위중하여 부모님이 정해준 고향 처녀와 혼인을 했었습니다, 딸도 하나 두었는데 작년에 헤어졌습니다. 내가 영수 씨를 만나러 이 자리에 나온 게 뻔뻔스럽고 염치가 없지요.”

정희의 뜻하지 않은 고백은 영수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혼남이라는 데도 놀랐지만 딸이 있다는 말에 더욱 놀랐다. 주책없는 눈물이 흘렀다. 느닷없는 눈물에 당황한 정희는 엉겁결에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영수가 먼저 몸을 추스르고 침묵을 깼다.

“죄송해요. 제가 짐작을 했어야 되는 건데…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아닙니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이 자리에 나온 게 사단입니다. 죄송합니다.”

눈물이란 게 참 묘했다. 눈물은 인간의 극적인 감정을 녹여주는 마력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눈물을 흘린 후에 찾아오는 평온과 반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중령님과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가 봐요. 그것도 이 난리 통에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까 내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근데 듣기로 아버님이 대지주시라고 하던데 전쟁 중에 피해는 없었는지요?”

“피해는 컸지만 식솔들 무탈한 것만 해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 난리 통에 무탈한 것만 해도 큰 다행이지요. 땅이야 도망가지 않을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곧 되찾게 될 겁니다.”

“한시바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쉽게 끝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처음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중령님같이 유능하신 분이 군문에 계시니까 곧 전쟁이 끝날 것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근데 전쟁 전에 교사하셨다고 하던데…”

“예, 전수학교에서 가사를 가르쳤습니다.”

“나도 대구사범 졸업하고 문경에서 3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근데 어떻게 군인이 될 생각을 하셨어요? 사범학교 나와서 교사 하셨으면 편하게 잘 사셨을 텐데요.”

“보통학교 다닐 때, 이순신 장군 전기와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이순신 장군과 나폴레옹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죠. 가끔 낙동강변에서 일본군들이 군사훈련을 하곤 했었는데 그걸 보고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군인이 되는 길을 몰랐고 너무 가난하여 상급학교로 진학할 여건도 되지 않았지요. 사범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었지요. 선생님이 부모님을 설득하여 돈이 거의 들지 않는 대구사범으로 겨우 진학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는 저의 적성에 맞지 않았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교직 생활이 너무 싫었어요. 게다가 나라 잃은 병, 흔히 조선병이라고 하잖아요. 그 병이 저에게도 발병되었어요. 식민지 백성의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만주 신경군관학교로 갔고 군관학교 졸업하고 일본 육사로 편입했지요. 일본 육사로 가는 데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학구열에 못 이겨 일본 육사로 편입했지요. 창씨개명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한신 장군이 동네 건달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갔던 고사를 떠올리며, 억지춘향 같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자위했습니다. 독립운동 했던 분들에게 한없이 미안했지만 일본의 선진 군사학을 배울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립이 되었을 때 국군을 조직할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줍는 사람도 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무 자기 합리화하는 것 같아 졸렬해 보이죠. 옹색해 보입니까?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조금 애처롭습니다. 믿든 말든, 난 왜놈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원인이야 어떻게 되었던 난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면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것이 내 평생의 오점으로 남을 겁니다. 내가 떳떳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리나라 독립에 방해가 되는 짓은 맹세코 절대 한 적 없습니다. 내 죄라면 내가 나라 없는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내 선택이 최선이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그것을 몇 배로 벌충할 겁니다. 앞으로는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것들을 조국을 위해 바칠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결기로 정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영수는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의 포로가 되어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그녀의 피를 끓게 했다.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바짝 당기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침을 삼켰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름다운 거 아닐까요.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독립운동이고 애국이라고 생각해요. 모두 다 총 들고 싸우러 가면 농사는 누가 짓고 소는 누가 키우겠어요. 또 애들은 누가 가르치겠어요. 일제하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산 덕분에 김구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실 수 있었고 또 해방이 된 거 아니겠어요. 조금 우습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아녀자의 소견으론 그런 것 같아요.”

영수의 말에 정희의 눈은 그녀를 온통 태워버릴 듯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영수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편해지네요. 사실 내가 일본 육사 나와 일본군으로 복무했다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요. 심지어 나보고 독립군 잡는 일을 했다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일제 식민지하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 길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난한 촌놈이 갈 수 있는 최선이 사범학교여서 그리 갔고 군인이 좋아 사관학교에 갔습니다. 비록 나라가 없어 왜놈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배운 것들이 언젠가 조국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난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젠 조국도 되찾았으니 그동안 못다 한 애국, 죽는 날까지 몸을 바쳐 실천하려 합니다. 단군 이래 한 번도 편안히 잘 살아보지 못한 우리 민족,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사는 세상, 잘먹고 잘사는 민족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군인으로서 주제넘은 생각이고 어쩌면 과욕이기도 하지만…. 내가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만 해서 미안합니다. 연애엔 완전 젬병이라서….”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감동스럽네요. 좋은 부모 만나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제가 정말 너무 부끄럽네요.”

“별말씀을,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쐴까요?”

“그럴까요.”

1950년 대구는 전쟁 피란민으로 북적거렸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다시 혼전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대구의 가을은 여지없이 깊어갔다. 긴 그림자를 드리운 플라타너스 희미한 불빛 사이로 까만 피부의 군인과 백옥 같은 얼굴에 학 목을 한 아가씨의 대비가 눈길을 끌었다.

“영수 씨, 이왕 이야기 꺼낸 거 다 이야기하지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들어보시고 아니다 싶으시면 언제든지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난 사실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군부 내 남로당 소탕작전에 연루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극적으로 풀려나 복직된 사람입니다. 형님이 남로당 간부였거든요.”

영수는 발이 꼬여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많이 놀라게 했지만 모든 게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신기했다. 정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영수 씨 내 모든 것을 숨김없이 주로 나쁜 것 위주로 다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다 좋은 겁니다. …… 이럴 때 할 말을 잘 모르겠는데요, 난 군인이니까 군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난 영수 씨가 좋습니다. 처음 본 순간, 난 결정했습니다. 영수 씨, 영수 씨만 싫지 않다면, 부디 이 박정희의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영수는 정희의 저돌적이고 갑작스런 구혼에 걸음을 멈추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은 가로등불이 뽀얗게 내려앉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긴 침묵이 살같이 흘렀다. 큰 결정이라고 반드시 긴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전쟁 중이었지만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쉼없이 지나갔다.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은 가장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였다.

“바쁘시겠지만 옥천으로 오셔서 우리 부모님을 한번 만나보시지요. 완고하신 분들이라 걱정이 됩니다.”

영수는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정희는 영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내 반드시 영수 씨를 행복하게 해드리리다.”

“…감사해요.”

영수가 갑작스러운 일로 온통 정신이 빠져 있는 사이, 그의 거친 입술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숭을 떨며 뿌리치긴 했지만 그녀의 눈은 벌써 행복에 빠져있었다. 정희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부부가 되어 부부싸움을 하면 육박전이 되겠죠?”

“호호, 진짜 그렇군요! 순발력이 정말 대단해요!”

만난 지 겨우 두 달쯤 된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와 육영수는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아버지 육종관이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여 결혼식에 불참하자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인 김영기 선생이 신부인 육영수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이날. 주례를 선 대구시장 허억이 신랑 육영수, 신부 박정희라고 호명하는 실수를 해 하객을 웃겼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래 5, 6, 7, 8, 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 국가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우리나라 유사 이래 최고의 위인이 누구냐고 필자에게 묻는다면 주저없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박정희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청소년기를 대구에서 보내고,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한 대구 사람이다.

(오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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