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령의 의연한 삶을 생각하며...
 
 

손승호 기자 ssh30529@hanmail.net

어래산 정상에 올라 초록으로 물든 산야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조국을 위해 산화(散華)하신 국군과 학도병의 모습이 보인다.
귀를 기울이니 스치는 바람결에 그분들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고, 산새도 슬픈 역사를 아는지 서글프게 우짖는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일은 애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추모하는 54회 현충일이다. 우리 고장에서도 집집마다 반기(半旗)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사이렌이 울리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의 예를 갖추어 감사의 마음을 표할 것이다.

6.25 전사(戰史)를 예기할 때, 북한군의 남쪽 진격을 저지하고 전세에 영향을 끼친 전투로 다부동전투와 더불어 안강전투를 꼽는다.
그 당시 전격적으로 남침한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점령, 작전주도권을 장악하여 7월말에는 진주-김천-안동-영덕에 이르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반면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 최후의 방어 작전을 전개했다.

 같은 해 7월 20일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사령부를 방문한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를 따르고자 북한군 12사단은 8월 공세를 전개하면서 동부전선 안동일대에 방어배치가 없는 공백지대를 확인하고 태백산맥 남단 산악지대를 이용 청송-죽장-기계-안동 축선으로 침투해 8월 9일에는 기계를 점령한 후 선봉대를 포항으로 전환시키고 주력을 경주 축선에 지향시켰다.

특히 안강전투는 국군 1군단(수도사단, 3사단)이 기계 안강 영덕 포항 일대에서 유격대(766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5사단,12사단)의 침공을 온힘을 다해 싸워 격퇴한 방어전투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전 · 사상자의 희생이 동반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군번 없는 학도병들이 자진 입대하여 분전감투(奮戰敢鬪)한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투 목록을 보면 안강전투는 1950년 8월 9일-9월 22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안강지역 전투시 작전명령서(작전명령 제157호)에 민간인을 전쟁에 이용하여도 가하다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민간인 신분으로도 노역 등으로 참여한 희생자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안강전투 결과 북한군은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하게 되었고, 아군은 기계 포항 북방으로 북한군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이행하게 됐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분들의 고고한 뜻을 되새겨야 한다.

2007년 1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MAKRI)이 창설됨으로써 발굴 작업은 보다 진전을 보이고 있다.
최후의 순간까지 유해발굴에 성심을 다해야한다. 이는 목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국을 위하여 용감무쌍(勇敢無雙)하게 적과 싸운 전몰장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일 것이다.

또한 경주지역에는 전몰유족 430명, 전상자584명이 있다. 현충일날 기념식도 중요하지만, 이분들을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의 위협이 예사롭지 않은 요즈음 유비무환의 교훈을 명심하고, 전몰장병이 지킨 우리 고장을 우리가 지킨다는 각오로 흐트러진 안보의식을 다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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