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 마종기

1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2
그렇다. 젊었던 나이의 나여,
평생 도망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하느님의 눈물 한 방울,
멀리 누워 있는 저 호수도
가엾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 짓누르던 세월의 불면증을
몇 번이나 호수에 던져버린다.
불면증 물려받은 호수가
머리까지 온몸이 젖은 채로
잠시 눈을 뜨고 몸을 흔든다.
연한 속살은 바람에 씻겨
호수의 살결이 틈틈이 트고
가는 다리까지 떨고 있다.


3
어디였지?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다 되어
호수도, 바람도, 다리도
대충 냄새로만 기억이 날 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끔
귓속의 환청의 아우성.
아무도 우리를 말릴 수 없다는
상처의 나이의 아우성.

 

상처5 / 마종기


나이 탓이겠지만 요즈음에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피가 많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심하게 다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처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세포들은
자꾸 머리를 부딪히며 소리 죽여 운다.

나이 탓이겠지만 남들의 상처도
전보다 쓸데없이 더 잘 보인다.
피부를 숨긴 공포의 빠른 도주도
가슴까지 흔들며 분명하게 보인다.
무자비한 욕망이 표정 죽이고
우리 사이에 집과 공장을 짓는다.

나는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기적의 알약은 커지기만 하고
주위를 날아다니는 공기의 입들이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떠들며
살충제의 바람을 만들어 주위에 뿌린다.
그래도 피나지 않는 마지막 것을
언제나 두 손에 들고 사는 너.

 

상처 / 마종기


오래 먼 숲을 헤쳐 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 버릴 수 없는 그 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상처 6  / 마종기

집 없는 새가 되라고 했니?
오래 머물 곳 없어야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야 진심에 골몰할 수 있다고.
설레는 피안으로 높이 날아올라
구름이 하는 말도 들을 수 있다고.
이승의 푸른 목마름도 볼 수 있다 했니?

잎 다 날린 춥고 높은 우듬지에서
집 없는 새의 초점 없는 눈이 되어야
우리 사이의 복잡한 넝쿨이 풀어진다 했니?
망각의 틈새에서 적적하고 노쇠한 뼈들이
몇 개쯤의 상처는 아예 손에 들고 살라 하네.
외지고 헐거운 삶의 질곡을 완성한다고.

문을 열면 나를 맞아준 것은
질서없이 도망간 흔한 변명뿐.
수척한 추위에 떨며 나를 안아주었네.

노을이 붉어질수록 깊이 잠기는
저녁 근처의 너는 벌써 새가 되었니?


아프지, 그게 진심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
아프지, 그게 오래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

상처 / 마종기

 

소나무 숲을 지나다
솔잎 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리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 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구름처럼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의외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인연도 천천히 숲으로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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