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32)> 제6대 성종 3


- 거란과의 전쟁 - 1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거란과 고려 간에는 전쟁의 가능성이 늘 상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란이 고려를 대등한 정도의 경쟁국으로 여긴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단지 거란의 입장에서는 송나라와의 전쟁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고려와의 싸움에 국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은 송나라보다 국력이 처지는 거란으로서는 고려가 송과 손잡고 자신들과 맞서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고려와는 외교적으로 풀어가기를 바랐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991년 10월 압록강 밖의 고려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고려에서 쫓아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끼어있어 완충역할을  해주고 있었는데 이제 고려가 이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거란은 불안감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거란과 고려 사이에 드디어 한판 붙게 된 것입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세 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강감찬 장군이 대승을 거둔 귀추대첩입니다. 또한 현종 때 두 번째 거란의 침입에는 비록 패하기는 하였으나 거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강조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란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는 어떤 사람이 활약을 펼쳤을까요. 우리가 익히 아는 서희의 담판과 강동 6주의 획득이 바로 이때 일어난 일입니다.

 

서희는 광종 1년 18세의 나이에 감과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내의시랑(內議侍郞, 정4품으로 국왕에게 국정 자문을 하는 차관 정도 직급)에 올라 송나라에 파견 되었습니다. 당시 송나라와 고려 간에는 10여 년간 교류가 없었는데, 서희는 송나라에 파견되어 두 나라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절도있고 예법에 적합한 행동으로 송나라 관리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그 후 병관어사(兵官御事, 국방부 대변인)와 내사시랑 (內史侍郞, 내무부 차관)을 거치면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여 왔을 때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군대를 편성하여 북계로 가서 거란을 방어토록 하였습니다. 이때 성종도 친히 거란군을 물리치고자 서경(평양)으로 갔다가 안북부(현재의 안주)까지 진군하여 머물고 있었는데, 거란군이 봉산군을 함락 시키고, 고려의 선봉 군사와 선봉대장 윤서안이 포로로 잡혔다는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거란의 총대장 소손영은 다음과 같은 글을 퍼트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영유하였다. 그런데 너희 고려에서 우리 강토를 강점하고 있으므로 이제 너희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으면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서희는 성종에게 달려와 소손녕의 글을 전하며 “전하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고 고하였고, 성종은 서희의 말에 따라 이몽전을 거란의 병영으로 보내 화의를 제의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손녕은 ”아군 80만 대군이 도착하였다. 만일 강가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반드시 너희를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한시라도 빨리 우리 군영 앞에 나와 항복하라. 아니면 고려는 멸망을 각오하라.“ 하고 항복을 종용하는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제 고려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로, 순간의 판단에 국가의 운명이 갈라질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 주여! 고려는 어찌해야한다는 말입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