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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1545) 7월에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돌아갔다. 인종의 스승이었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좌찬성으로 재임했을 때의 일이다. 종1품 좌찬성 자리는 삼정승 바로 다음의 직위로, 달리 이상(貳相)이라 부른다. 조선조 5백여 년 간 경주출신 인사로 많은 벼슬을 하였지만 좌찬성에 오른 사람은 회재뿐이다. 인종의 세제(世弟) 명종이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인종의 외숙 윤임과 명종의 외숙 윤원형이 진작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재의 운신은 매우 난감하였다. 선왕에 대한 충을 다해야 함은 물론 어린 임금을 보필해야 했었다. 마침내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신·구 외숙간의 파워게임이 시작되었다. 윤원형을 주축으로 한 소윤(小尹)은 임백령과 이기 등 심복을 앞세워 사림을 전복시키려했다. 소윤은 문정왕후의 후광을 업고 있었기 때문에 대윤 일파는 화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윤원형 등은 사사로운 원한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소인배들이다. 이들이 지목한 대윤 계열의 인물은 거의 사림이며 명현(名賢)이었다. 회재는 외척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없지만 한가롭게 자리만 지킬 처지가 아니었다. 안간힘을 쓰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40여 명이 사사되거나 귀양 가는 등 화를 입으니, 이를 을사사화라 한다. 이듬해 봄에 회재는 사직서를 내고 향리에 내려와 은거했으나 화는 단행(單行)하지 않았다. 양재역 벽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글이 나붙자 이기는 회재를 모함하는 글을 명종에게 올렸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꾸며내 헐뜯으며 무고하였다. 회재는 이로 인하여 평안도 강계에 안치(安置)되었다. 7년 간 혹독한 고초를 겪다가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회재는 흥해읍 달전 도음산에 장사 지내졌다. 선조 19년(1586)에 세운 묘비의 글은 퇴계의 제자 기대승이 지었다. 기대승은 회재가 이기의 억울한 모함을 받고 귀양간 사실을 비문에 상세히 적어 두었다. 선조 5년(1572)에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서원 앞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은 관행이었다. 당시 후손들은 신도비명을 따로 글을 받아서 세우지 않고 기대승이 지은 묘비명의 글을 서원 앞에 다시 건립하기로 하였다. 선조 10년(1577)에 관찰사 박소립의 도움으로 서원 외삼문 앞 용추 폭포 위에 신도비를 세우고 음기(陰記)에 사실을 밝혀 놓았다. 따라서 회재의 묘비명과 신도비명을 지은 사람은 기대승이고, 묘비명과 신도비의 글씨는 손엽과 권산해가 각각 썼다. 한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 어려서 기동(奇童)이라 일컬으며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말 못할 고민과 치부를 안고 살았는데, 바로 을사사화를 일으킨 이기가 그의 증조부이기 때문이다. 선조가 저질러 놓은 과오와 업보를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그 허물을 덮으려 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갈 때 반드시 먼저 갔다가 사람들이 다 나간 뒤늦게 물러났다. 남들이 그를 보면 나쁜 말이 증조 이기에게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그러던 이안눌이 광해군 5년(1613)에 경주 부윤으로 부임해 왔다. 새 부윤이 오면 먼저 향교 성전을 배알하고 명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서원을 찾아 봉심하는 것은 일반적 행례였다. 옥산서원을 찾아가는 이안눌의 발걸음은 참으로 무겁고 힘들었다. 그가 옥산서원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 부근에 살고 있는 회재의 후손들이 몰려와 길을 막았다. 이기가 회재에게 저지른 소행을 생각한다면 그의 증손이 부윤이라도 서원 묘정에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때 이안눌의 행동이 극적이었다. 수레에서 버선발로 걸어 나와 증조부 이기의 잘못을 머리 숙여 사과하며 눈물을 흘렀다. 부윤의 이 같은 사의에 감동한 회재 후손들은 길을 트였다. 그런데 서원 입구에 기대승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었다. 회재 후손들은 신도비를 흰 천으로 덮어 씌워놓고 이안눌이 못 보게 했다. 이안눌의 간절한 청에 의해 천을 걷고 조심스럽게 비문은 읽던 그는, 그만 신도비를 안고 통곡하고(抱碑而泣) 말았다. 이기의 죄목을 읽었던 것이다. 글을 다 읽고 난 그는, 비문 가운데 선조의 이 내용만 삭제해 줄 수 있다면 자신은 옥산서원의 노비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숙연하였다. 그 뒤 이안눌은 옥산서원과 회재의 고택을 수리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용추 위에 있었던 신도비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비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길목에 세워 널리 읽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옥산서원 신도비는 도리어 외진 곳으로 옮겨 사람의 눈길을 피하게 하고 있다. 아마도 이안눌의 이 같은 노력과 사죄에 따라 이건했던 것이다. 지금 용추 위에 옛 신도비의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당시 독락당의 주인은 회재의 손자 구암(求庵) 이준(李浚)이었다. 그는 경산군수를 역임하고 옥산서원을 창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안눌이 서원을 찾았을 때 회재 후손들이 길을 막은 배후에는 이준이 있었다. 이안눌의 행동에 감동한 이준은 더 이상 선조들의 일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서원 강당에 들어선 두 사람은 뜨겁게 손을 마주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참으로 기연(奇緣)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내 두 사람은 절친한 지우(知友)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준은 강동 모서 부근 모두연에 정자를 지었다. 어느 날 부윤 이안눌을 불러 시와 술로 즐긴 후 정자 제호를 부탁하였다. 조금 뜸을 들인 이안눌은 ‘무금정(無禁亭)’이라 지었다.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글귀로, 청풍명월은 아무리 가지고 즐겨도 금하는 이 없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세상의 영욕을 잊고 자연을 벗 삼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로써 양가의 해묵은 구원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화해와 우의를 나눈 계기가 되었다. 무금정에는 언제나 이안눌이 지은 시 한 수가 걸려있었다. 그 후 무금정은 헐렸던 것을 후손들은 선조의 훌륭한 뜻을 되새기기 위해 새로 지었다. 독락당 앞으로 옮겨 지은 무금정은 이 같이 의미를 담고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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