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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ㅣ獨眼龍]

효의정(손승호) 2022. 2. 4. 16:50


 
○ 한 눈을 가지고도 용맹한 사람
○ 獨(홀로 독) 眼(눈 안) 龍(용 룡) 
 
애꾸눈인 용이라는 뜻으로, ① 애꾸눈의 영웅(英雄) ② 애꾸눈인 고덕(高德)한 사람. 한 눈을 가지고도 용맹한 사람을 말함. 
 
《오대사(五代史)》 당기(唐記)와 《당서(唐書)》 이극용전(李克用傳) 등에 나오는 말이다. 당(唐)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안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심하고 밖에서는 각지의 절도사들이 발호하여 국정이 몹시 어지러웠다. 농민들은 정권의 부패로 과도한 세 부담에 시달렸는데, 여기에 기근이 겹치자 농토를 떠나 유적(流賊)이 되었다. 9세기 후반, 희종(僖宗) 때 소금 암매상 황소(黃巢)는 왕선지(王仙芝)와 함께 이런 농민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다. 그러고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였다. 희종은 난을 피해 촉의 성도(成都)로 몽진했다. 그 곳에서 희종은 돌궐족 출신의 맹장 이극용(李克用)에게 황소군의 토벌을 명하였다. 
 
이극용은 일찍이 방훈(龐勛)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절도사(振武節度使)로 임명된 이창국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용맹을 떨쳤다. 그는 4만여 명의 군사를 직접 지휘하며 반군과 싸웠는데, 이때 그의 군사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갈가마귀 군사[鴉軍]라고 불리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용맹하여 반군들은 이들을 보기만 하여도 벌벌 떨었다 한다. 희종은 난 중에 죽고, 소종(昭宗)이 즉위한 884년 이극용은 허난[河南]에서 황소를 패사(敗死)시켜, 이 공으로 진왕(晉王)에 책봉되었다. 황소의 난을 평정한 후 이극용은 같은 시기에 동평군왕(東平郡王)에 책봉된 주전충(朱全忠)과 하북 3진(鎭)을 놓고 다투었다. 주전충이 하중(河中)을 제압하자 실의에 차 있다가 병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절개를 지키며 당에 충성을 다하려는 이극용을 높게 평가했는데, 이극용의 한쪽 눈이 아주 작아 거의 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독안룡이라 불렀다. 이와 같이 독안룡은 본래 애꾸눈의 용맹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후에는 애꾸눈이지만 덕이 많은 사람까지도 지칭하게 되었다.